고대사

에르난 코르테스: 아스텍 제국을 무너뜨린 정복자의 생애와 업적

에르난 코르테스 몬로이 피사로 알타미라노(Hernán Cortés Monroy Pizarro Altamirano)는 페르난도 코르테스(Fernando Cortés) 또는 에르난도 코르테스(Hernando Cortés)로도 불리며, '코르테스(Cortez)'라는 표기로도 알려진 스페인의 정복자이다. 그는 현재의 멕시코 영토 상당 부분을 스페인 왕실을 위해 정복했다. 1485년 스페인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의 메데인에서 귀족 마르틴 코르테스와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의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1547년 12월 2일 세비야 인근 카스티예하 데 라 쿠에스타에서 생을 마감했다.

출생과 청년기, 쿠바로의 진출

에스트레마두라 귀족 마르틴 코르테스의 외아들인 그는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6촌 형제이기도 하다. 피사로는 훗날 잉카 제국을 정복하게 된다. 귀족 가문 출신인 그는 살라만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수학했으나 2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모험심과 신대륙에 대한 동경으로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식민지로 향한다.

쿠바 정착과 원정 준비

1511년 디에고 벨라스케스 데 쿠에야르를 따라 쿠바에 건너가 에스파뇰라 섬 정복에 참여했다. 공로로 산티아고 데 쿠바의 초대 시장이 되고 대규모 영지와 노예를 하사받았으나, 벨라스케스에 대한 음모 혐의로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 후 벨라스케스의 처제 카탈리나 수아레스 마르카이와 결혼하며 입지를 다졌다.

당시 프란시스코 에르난데스 데 코르도바(1517년)와 후안 데 그리할바(1518년)의 유카탄 원정대가 금과 부유한 땅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돌아오자, 코르테스는 전 재산을 팔아 함대를 꾸렸다. 벨라스케스(당시 쿠바 총독)와 '탐험 및 교역' 명목으로 원정 계약을 맺었으나, 벨라스케스의 의심은 깊어만 갔다.

멕시코 원정대의 출항

1518년 11월 18일, 벨라스케스가 원정 취소를 내릴까 두려워한 코르테스는 산티아고 데 쿠바 항을 서둘러 출항했다. 준비가 미흡해 트리니다드 등지에서 보급과 선박을 추가 확보한 뒤, 1519년 2월 10일 마침내 11척의 배, 보병 518명, 기병 16명, 포수 13명, 총병 32명, 선원 110명, 인디언 및 흑인 노예 200명, 말 32필, 청동 대포 10문, 팔코네트(소형 대포) 4문을 이끌고 쿠바를 떠났다. 원정대 장교들 중 다수는 이탈리아 전쟁 참전 베테랑이었고, 선장(파일럿)은 안톤 데 알라미노스였다.

최초의 접촉과 '라 말린체'의 합류

유카탄에 잠시 들렀으나 금을 거의 찾지 못한 뒤, 3월 4일 베라크루스 인근에 상륙했다. 코수멜에서 원주민들은 음식, 깃털, 금을 바치며 테노치티틀란의 대추장이 다스리는 나라라 알렸다. 그러나 인신공양 등 잔혹한 풍습에 경악한 코르테스는 우상들을 파괴하고 십자가와 성모상을 세웠다.

이후 타바스코 강 하구에서 적대적인 부족을 총기와 말에 놀란 틈을 타 격파했다. 추장들은 음식, 장신구, 노예 20명을 바쳤는데, 그중 한 여성이 바로 말린친(Malintzin), 스페인명 마리나(Marina)다. 마야어와 나와틀어에 능통하고 원주민 심리에 밝았던 그녀는 '라 말린체(La Malinche)'로 불리며 통역관, 조언자, 연인으로서 정복 전쟁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정복은 10~20년 더 걸리고 스페인 측 피해도 훨씬 컸을 것이다. 그녀는 코르테스와의 사이에서 마르틴이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다.

아스텍 제국과의 조우

타바스코에서 서쪽 '멕시코'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된 원정대는 북서 해안을 따라 항해하다 아스텍 황제 모테수마 2세의 사신들을 만났다. 코르테스는 말과 대포를 보여주며 위압감을 주면서도 평화를 강조했다. 사신들은 화가와 기록원을 대동하고 스페인군의 존재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사신들이 선물을 들고 다시 왔을 때 코르테스는 황제 알현을 고집했다. 이때 '케찰코아틀(금빛의 귀환 신)' 신화가 거론되었고, 통역 마리나의 조언에 따라 코르테스는 자신이 그 신의 사자임을 내세우며 심리전을 폈다. 곧 솜포알라 출신 원주민들이 아스텍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도와달라며 찾아왔고,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적들을 규합해 '테울레(신적 존재)'의 위세로 내분을 이용하려 했다.

베라크루스 건립과 함대 파괴

상륙지인 성금요일(Good Friday)에 맞춰 '비야 리카 데 라 베라 크루스(Villa Rica de la Vera Cruz)'라는 도시를 세우고, 병사들의 청원에 따라 벨라스케스 권한에서 벗어나 국왕 직속 '대장(Captain General)'직을 수락했다. 이로써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유럽인 자치 도시가 탄생했다.

벨라스케스가 유카탄 총독으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코르테스는 충신 몬테호와 포르토카레로에게 전리품을 주어 스페인 궁정에 로비하게 했다. 동시에 벨라스케스 충성파의 탈영과 귀환을 막기 위해 배 1척만 남기고 나머지 10척을 해변에 끌어올려 침몰시켰다(나중에 '배를 태웠다(quemar las naves)'는 전설로 과장됨). 이는 퇴로를 끊고 결사항전을 다지는 상징적 조치였다.

내륙 진군: 틀락스칼라 동맹과 촐룰라 학살

1519년 8월 16일 내륙 행군을 시작했다. 고원 지대의 추운 날씨와 비옥한 계곡을 지나 아스텍의 숙적이자 독립국인 틀락스칼라에 도달했다. 9월 2일 틀락스칼라군이 공격해 왔으나 철검, 석궁, 화기, 기병의 위력과 '죽일 때까지 싸우는' 스페인식 전술로 대승을 거뒀다. 코르테스는 항복을 권유했고, 틀락스칼라인들은 2,000명의 전사와 짐꾼을 제공하며 동맹이 되었다.

모테수마의 성지 촐룰라에 입성했을 때 화려한 환대 뒤 암살 음모가 숨겨져 있었다. 마리나가 노파로부터 정보를 입수해 알렸고, 코르테스는 선제공격으로 귀족들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워 1만 5천~3만 명을 살해했다. 이는 정복 전쟁 최대 규모의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된다. 코르테스는 모테수마에게 '무례에 대한 응징'이라 통보하며 황금과 존경을 요구했다.

테노치티틀란 입성과 모테수마 감금

포포카테페틀, 익스타시와틀 화산 사이를 지나 11월 8일 아스텍 수도 테노치티틀란에 입성했다. 모테수마는 스페인인을 동방에서 온 신의 사자(케찰코아틀)로 여기며 아쇼야카틀 궁전을 내어주고 극진히 대접했다. 스페인인들은 본 적 없는 화려한 도시에 경탄했다.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요구했고, 모테수마는 매년 스페인 왕과 코르테스에게 동량의 금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신전 우상을 치우고 성당을 세우는 요구도 수용했다. 궁전 수색 중 비밀 방에서 아쇼야카틀이 모은 막대한 보물을 발견한 코르테스는 아스텍의 반격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때 베라크루스에서 후안 데 에스칼란테 시장 등이 아스텍군에게 피살되고 스페인인 포로의 목이 황제에게 보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스페인인이 불사신이 아님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코르테스는 모테수마를 인질로 잡았고, 배후자를 처형시켰으며 모테수마에게 카를로스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나르바에스 원정대 격파와 '노체 트리스테(슬픈 밤)'

이후 18척의 스페인 함대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왔다. 지원군인 줄 알았으나, 벨라스케스가 보낸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 함대였다. 이들은 모테수마에게 코르테스가 반역자라 선동했다. 코르테스는 페드로 데 알바라도에게 100명을 남겨 수도를 지키게 하고 주력 300명으로 나르바에스를 기습, 격파하고 포로로 잡았다. 나르바에스 병사들은 테노치티틀란의 부귀를 듣고 코르테스 편에 합류했다.

대신전 학살과 반란

코르테스 부재 중 알바라도는 아스텍인들이 톡스카틀 축제(테스카틀리포카 또는 우이칠로포치틀리 제사) 중 무방비 상태라 판단, 선제공격으로 대신전 광장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시민들이 봉기해 스페인군은 궁전에 고립되었다.

귀환과 야간 탈출

6월 24일 코르테스가 귀환했다. 모테수마의 형 쿠이틀라우악을 석방해 진정시키려 했으나 그는 콰우테목 등 귀족들과 합세해 새 황제가 되었고 포위망을 좁혔다. 코르테스는 모테수마를 발코니에 세워 퇴각을 종용했으나 군중의 돌팔매에 맞아 모테수마는 며칠 뒤 사망했다.

식수와 식량이 떨어지자 1620년 6월 30일~7월 1일 폭우 속 '노체 트리스테(La Noche Triste)' 야간 탈출을 감행했다. 금괴를 짊어지고 도망치다 600명 이상의 스페인인과 2,000명 이상의 동맹군이 전사하고 말, 대포, 보물 대부분을 잃었으나 코르테스는 간신히 탈출했다. 7월 7일 오툼바 전투에서 아스텍 추격대를 격파하고 틀락스칼라로 피신했다.

테노치티틀란 포위와 아스텍 제국 멸망

틀락스칼라 및 반아스텍 부족들의 지원을 받아 테노치티틀란을 재포위했다. 장장 수개월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고, 12만~24만 명의 아스텍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521년 8월 13일 마지막 황제 콰우테목이 항복하며 아스텍 제국은 멸망했다.

온두라스(라스 이부에라스) 원정과 캘리포니아 탐험

정복 후 코르테스는 온두라스 지역(라스 이부에라스)의 부와 태평양-대서양 연결 해협(아니안 해협) 존재에 주목했다. 1524년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에게 함대를 보냈으나 올리드가 벨라스케스와 결탁해 배신하자, 사촌 프란시스코 데 라스 카사스를 보내 올리드를 처단했다. 이후 코르테스 본인이 육로로 원정대를 이끌고 이동했다.

1530년대에는 태평양 탐험에 몰두했다. 기사도 소설 <에스플란디안의 모험(Las Sergas de Esplandián)>에 나오는 '캘리포니아 섬' 전설에 매료되어 1532년, 1533년, 1534년, 1539년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하거나 직접 지휘했다. 이 과정에서 바하 캘리포니아 반도를 발견(최초 상륙은 포르툰 히메네스)하고 캘리포니아 만(베르메하 해) 북단 콜로라도 강 하구까지 도달해 영토를 선포했으나, 식량난과 원주민 저항, 누에보 갈리시아 총독 누뇨 데 구스만과의 갈등 등으로 정착에는 실패했다.

평가: '흑색 전설'과 역사적 진실

영국과 네덜란드 등 스페인의 적국들은 '흑색 전설(Leyenda Negra)'을 퍼뜨려 코르테스를 잔혹한 학살자로 묘사했다. 그러나 아스텍 제국 자체가 정복한 부족(틀락스칼라, 토토낙 등)에게서 막대한 인신공양 제물을 바치게 하는 공포 정치로 군림했음이 유골 발굴과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 등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코르테스는 이들 피지배 부족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 정복에 성공했으며, 후대 영미 식민주의자들과 달리 원주민과의 공존을 모색했고 통역 마리나와의 결혼 등에서 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말년과 죽음

카를로스 5세(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는 그의 공로를 치하해 '오아하카 계곡 후작(Marqués del Valle de Oaxaca)' 작위를 내렸으나, 신대륙 총독직은 주지 않았다. 코르테스는 다시 아메리카로 돌아가려던 중 1547년 12월 2일 카스티예하 데 라 쿠에스타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