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 오토 슈코르체니
오토 슈코르체니(Otto Skorzeny)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유명한 독일군 장교 중 한 명이었다. 정예부대 '브란덴부르크' 출신인 그는 전쟁 기간 독일이 수행한 가장 대담한 특수작전들을 기획하고, 실행했으며,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무솔리니의 극적인 구출 작전과 벌지 전투(아르덴 대반격)에서 보여준 그의 부대 활동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그보다 더 험난한 작전들에도 깊이 관여했다. 연합군에게 슈코르체니는 거의 '악의 화신'과 같은 존재였다. 흥미롭게도 연합군에 대한 게릴라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쟁 막바지에 스스로 미군에게 항복하기를 선택했다.
CIA의 보호막 아래에서
슈코르체니는 한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전쟁범죄 혐의로 재판을 받았지만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에는 SS 출신 동료들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탈출 전 과정을 미국이 모두 알고 있었으며, 실제로 미국이 도왔다고 주장했다.
이후의 전개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듯하다. 1951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슈코르체니는 스페인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냉전이 뜨거운 전쟁으로 번지던 때였다.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약화된 서유럽은 오직 미국의 핵무장에만 의존해 소련의 침공을 막고 있었다. 유럽에서 소련과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극에 달해 있었다. 슈코르체니는 스페인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다. CIA의 묵인 아래, 그는 소련이 서유럽을 침공할 경우 이에 맞설 독일군 부대를 조직하는 활동에 착수했다. 프랑코 치하 스페인으로 피신했던 독일 참전용사들의 모집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은 슈코르체니가 소련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어떤 일이 있어도 용납할 수 없었다. 이에 CIA는 그를 방해하지 말고, 오히려 소련으로부터 보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슈코르체니는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20만 규모의 병력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1953년 슈코르체니는 이집트로 향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军 첩보국을 이끌었고, CIA의 심복이자 당시 서독 정보기관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len) 장군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잠시 군사 고문의 역할을 수행했다. 슈코르체니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코만도 훈련도 실시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야세르 아라파트였다. 그는 한동안 나세르 대통령의 고문으로 남아 있기도 했다.
모사드와의 은밀한 거래
1989년, 슈코르체니가 1963년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포섭되어 이집트 미사일 개발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슈코르체니와 모사드의 협력 관계는 전 모사드 국장 이셀 하렐(Isser Harel)이 "이스라엘이 실제로 아랍 국가에서 활동하던 독일 출신 전직 군인들을 포섭한 적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간접적으로 확인되었다.
일부 자료는 슈코르체니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도 모른 채 모사드에 협력했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견해는 그가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무죄 판결을 대가로 정보를 넘겼다고 본다. 그러나 가장 유력한 해석은, 슈코르체니가 자신이 누구를 위해 일하는지 매우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슈코르체니가 제공한 덕분에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위해 일하던 독일 로켓 과학자 하인츠 크루크(Heinz Krug)를 암살했고, 이후 로켓이 생산되던 333 공장에 폭탄을 설치해 이집트인 다섯 명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동시에 슈코르체니는 이집트에 군사 물자를 공급하던 유럽 기업들의 명단과 정보도 이스라엘 측에 건네주었다.
슈코르체니는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전설을 끝까지 지켜냈으며, 역사 속에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로 기억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