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파르 드 콜리니(Gaspard de Coligny, 1519년 2월 16일 ~ 1572년 8월 24일)는 프랑스의 제독(Admiral of France)이자 위그노 전쟁 시기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콜리니 백작, 보퐁·보부아르 남작, 몽쥐프·로시아·슈비냐 등 여러 지역의 영주이자 샤티옹의 영주였으며, 저명한 콜리니 가문 출신 인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로 꼽힌다.
그는 프랑수아 1세 치세에 프랑스 원수를 지낸 가스파르 1세 드 콜리니와 아내 루이즈 드 몽모랑시 사이에서 태어났다. 형제로는 샤티옹 추기경이 된 오데, 그리고 프랑수아 드 콜리니 당들로가 있다.
1519~1530년, 지방에서의 유년 시절
가스파르 드 콜리니는 샤티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오랜 역사를 지닌 가문의 후손으로, 1514년 페르시 드 마이의 미망인이었던 루이즈 드 몽모랑시와 결혼했다. 루이즈의 형제 중 한 명은 1538년부터 1541년까지 프랑스 대궁내경(Constable of France)을 지낸 안 드 몽모랑시였다. 아버지 가스파르 1세는 1522년 기옌에서 사망했는데, 이때 가스파르 2세는 세 살배기였지만 이미 전쟁 놀이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 루이즈 손에서 세 형제와 함께 자랐는데, 장남 피에르(1515~1528), 오데(1517), 막내 프랑수아(1520)가 바로 그들이다.
어린 콜리니 형제들은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 가정교사 니콜라 베로는 에라스무스 및 기욤 뷔데와 서신을 주고받던 학자였다. 당시 신사는 삼학(trivium)과 사학(quadrivium)뿐 아니라 궁정 예술(특히 춤과 테니스), 전쟁 기술(승마와 검술)도 익혀야 했으며, 가스파르와 그의 형제들은 참전 용사였던 기욤 드 프륄레의 지도 아래 이를 배웠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외삼촌 몽모랑시가 교육을 감독했고, 라틴어에서 눈부신 진전을 보인 가스파르에게 성직자의 길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 가스파르는 굳이 반발하며 군인의 길을 택하고 싶어 했다.
1530~1542년, 프랑수아 1세 궁정에서의 청소년기
1530년, 어머니 루이즈 드 몽모랑시가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시녀로 임명되면서 가족은 함께 궁정에 들어갔다. 당시 프랑스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화려했던 곳 중 하나였고, 명문 가문들이 왕의 총애를 두고 경쟁하는 가운데 몽모랑시 가문의 영향력도 날로 커지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당시 유럽 최강국은 프랑스, 그 경쟁 상대인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교황령이었다. 여기에 분쟁 발생 시 균형을 좌우할 수 있는 잉글랜드가 더해졌다. 종교적으로는 볼로냐 협약을 통해 프랑스가 일정 수준의 독립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인문주의가 확산되면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비판적 목소리가 커져 루터 사상 확산을 우려한 대학과 수도회 내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530년에는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이 번역한 불가타 성서 판본이 출간되었다. 국왕의 누이동생인 앙굴렘의 마르그리트 역시 개혁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으며, 콜리니 가문이 궁정에 들어왔을 무렵 국왕은 아직 이러한 움직임을 관용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1533년, 로마와 잉글랜드의 단교가 이루어진 해에 프랑수아 1세는 아들 도팽 앙리를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조카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혼인시켰다. 고마움을 느낀 교황은 프랑스에 일곱 개의 추기경 자리를 하사했는데, 불과 16세였던 오데 드 콜리니도 그 수혜자 중 한 명이었다.
1534년에는 낱장 사건(Affaire des Placards)이 터지면서 루터교도에 대한 강경한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럼에도 프랑수아 1세는 개혁파 독일 제후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아 곤란한 입장에 놓였다.
한편 가스파르는 보리외 수도원장 기욤 뒤 메느를 스승으로 삼아 왕의 자녀들과 함께 공부를 이어갔다. 그는 키케로와 프톨레마이오스를 연구했고, 당시 크게 유행하던 우주지리학(cosmography)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궁정은 끊임없이 이동했고, 어린 콜리니 형제들은 왕을 따라 성에서 성으로 옮겨 다녔다. 이 시기 가스파르는 특히 젊은 프랑수아 드 기즈와 친분을 쌓았다. 동생 프랑수아와 함께 상당한 인기를 얻었던 덕분에 1541년 몽모랑시가 실각했음에도 그들의 궁정 지위에는 지장이 없었다. 몽모랑시는 제국군과의 전쟁을 피하려 했으나 전쟁은 불가피해졌고, 1542년 콜리니 형제는 드디어 전장에 나설 준비를 마쳤다.
1542~1546년, 첫 무공
오데는 성직의 길을 선택했고, 몽모랑시 외삼촌은 궁정에서 물러난 상황이었다. 이제 젊은 콜리니 형제에게 남은 것은 무공으로 이름을 알리는 길뿐이었다. 카를 5세와의 전쟁이 선포되자 가스파르는 룩셈부르크, 플란더런, 이탈리아 전역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세리솔레의 단명한 승전에 참여했다. 황제와 강화 조약이 체결된 뒤(1544년)에는 클로드 다네보가 지휘하는 잉글랜드에 대한 해상 공세에 합류해 여러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도 과감함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546년 헨리 8세와 강화가 맺어지면서 가스파르는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이 흔히 그렇듯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에스테 공작부인의 궁정이 있던 페라라에 머물렀으나, 1547년 3월 31일 프랑수아 1세의 죽음 소식에 발걸음을 재촉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앙리 2세의 치세
새 국왕 앙리 2세가 거둔 첫 행보 중 하나는 가스파르의 외삼촌인 몽모랑시 대궁내경을 복권시키는 것이었다. 가스파르는 국왕 침실의 평시 시종관(gentleman of the king's chamber)에 임명되고 생미셸 훈장을 받았으며, 1547년에는 보병 대장(colonel general of the infantry) 직책을 수여받았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 루이즈 드 몽모랑시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녀는 말년에 개혁 사상에 깊이 가까워져 있었다. 또한 이 해 가스파르는 라발 백작 기 16세의 딸 샤를로트 드 라발과 결혼했다. 이듬해에는 막내동생 프랑수아가 차례로 부유한 상속녀와 혼인했다. 그러나 앙리 2세의 궁정은 음모의 온상이었고, 몽모랑시 가문과 왕의 전권 정부인 디안 드 푸아티에의 지원을 받는 기즈 가문은 앙리 2세의 총애를 두고 격렬히 다투었다.
런던 파견
앙리 2세의 통치는 개혁파에 대한 박해의 재개와, 불로뉴 반환을 계속 거부하던 잉글랜드의 위협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1542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원문 표기: 제임스 1세)의 죽음으로 왕위를 계승한 메리 스튜어트의 왕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1548년 헨리 8세가 죽고 뒤를 이은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6세와 메리 스튜어트의 혼인이 이루어진다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관이 하나로 합쳐질 것이었는데, 메리의 외숙부인 프랑수아 드 기즈를 비롯한 기즈 가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를 원치 않았다. 콜리니는 강화 협상을 위해 런던으로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앙글리칸 개혁이 프로테스탄티즘에 가까워지며 급진화된 에드워드 6세를 알현했다. 파리로 돌아온 뒤, 왕을 위해 헌신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판단한 콜리니는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 여유를 군대의 행실을 닦게 하기 위한 매우 엄격한 군율법의 초안 작성에 쏟았다.
에스파냐와의 전쟁
얼마 지나지 않아 국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였고, 콜리니는 다시 전장에 나섰다. 프랑수아 드 기즈가 지휘한 메스 공방전에서는 배제되었지만, 랑티 전투의 승리에는 기여했다. 1553년에는 프랑스 제독(Admiral of France)에 임명되었고, 이후 피카르디 총독에 임명되었다.
1557년, 보크엘 휴전이 카를 5세에 의해 깨진 뒤 에스파냐군이 콜리니가 방어하던 생캉탱을 포위했다. 그는 오랜 저항 끝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의 결사적인 방어 덕분에 적의 프랑스 본토 침공은 저지되었다.
앙리 2세 국왕이 사망한 뒤, 궁정의 음모에 싫증을 느낀 콜리니는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영지로 물러났다. 이 은거 기간 동안 개혁자들의 저술을 읽으면서 그의 종교적 견해가 변화했고, 그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그의 개종은 주로 아내 샤를로트 드 라발과 동생인 콜리니 추기경 오데의 권유에 힘입은 것이었다.
종교 전쟁
1562년 프로테스탄트 진영과 가톨릭 진영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콜리니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중장(lieutenant general)으로 임명되어 콩데 공의 지휘 아래 싸웠으며, 이 공작과 함께 드뢰 전투에서 프랑수아 드 기즈 공작에게 패배했다.
1562년에는 위그노 선장 장 리보를 선택해 샤를 9세 국왕의 허가 아래 같은 신앙을 지닌 150명의 동료 신자들과 함께 플로리다에 식민지를 건설하도록 파견했다.
1563년, 폴트로 드 메레가 기즈 공작을 앙리 벽 아래에서 암살한 배후로 콜리니가 지목되어 비난을 받았다. 기즈 공작의 죽음으로 몇 년간의 평화가 찾아왔다.
1567년 양측이 다시 무장에 나서자, 그는 콩데 공과 함께 궁정을 떠나 부르고뉴로, 이어 라로셀로 피신했다. 그는 루이 1세 드 콩데, 프랑수아 드 콜리니, 기욤 18세 드 라발과 함께 1567년의 '무(Meaux) 추격'의 배후 세력으로 간주되는데, 이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샤를 9세 국왕과 섭정 카트린 드 메디시스를 납치하려 시도한 사건이었다.
콜리니는 결판이 나지 않은 생드니 전투에 참여했다. 제3차 종교 전쟁에서는 연패를 거듭했다. 먼저 1569년 3월 13일의 자르낙 전투에서 콩데 공이 전사했고, 라로슐라베유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용병들이 약속한 보수를 받지 못해 전리품을 요구하면서 푸아티에 포위전에서 시간을 허비했으며, 포위를 풀어야만 했다. 결국 1569년 10월 3일 몽콩투르 전투에서 앙주 공작(훗날 앙리 3세)에게 패배하고 부상을 입었다.
이후 콜리니는 부대를 이끌고 남방으로 후퇴하며 몽뤼크와 몽모랑시당빌의 추격을 따돌리고, 랑그도크에서 '비콩트(Vicomtes)' 군과 합류했다. 그는 주도권을 되찾아 병력을 모집하고 가톨릭 마을들을 공략했으며, 생테티엔을 점령하고 아르네르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1570년에는 라샤리테쉬르루아르까지 진격해 파리를 위협했다. 결국 국왕이 굴복하며 1570년 8월 8일 생제르맹 강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콜리니는 자신을 사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했던 샤를 9세의 신임을 다시 얻으려 했다. 1571년, 그는 궁정으로 복귀했고 국왕은 그를 환영했다.
그러나 궁정의 가톨릭 세력은 그를 증오했고, 국왕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에스파냐에 대항해 플란더런에 개입하겠다는 그의 제안은 세 차례나 거절당했다.
성 바르톨로메 축일의 대학살이 준비되고 있었고, 제독은 그 첫 번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1572년 8월 22일, 앙리 드 나바라(훗날 앙리 4세)의 혼례 직후, 모르벨이 기즈 가문 소유의 집에서 콜리니를 향해 총을 쐈다. 이 습격의 책임 소재에 대해 역사가들은 다음 세력을 지목한다.
* 카트린 드 메디시스 본인
* 기즈 가문
*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를 대표한 알바 공작
어쨌든 샤를 9세는 부상자의 병상 곁을 직접 찾아 정의를 실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든 프로테스탄트 지도자들의 암살이 결정되었고, 1572년 8월 23일 밤부터 24일로 넘어가는 새벽, 성 바르톨로메 축일의 대학살이 벌어졌다. 콜리니는 침대 위에서 참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샤를 다노비츠에 의해 창밖으로 던져져 마당에 내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