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Day 상륙과 캉 확보 임무
1944년 6월 6일, 캐나다 제3보병사단은 주노 비치에, 영국 제3보병사단은 소드 비치에 각각 상륙했다. 두 사단의 임무는 교두보를 확보한 직후 즉시 진격하여 캉(Caen) 시와 오른 강의 다리들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캐나다군은 캉 남서쪽의 카르피케(Carpiquet) 비행장 확보를 담당했고, 영국군의 목표는 캉 시 자체였다. 한편 '골드' 해안에 상륙한 영국 제50보병사단은 서쪽 더 먼 지역에서 미군과의 연결을 확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두 개의 제3사단이 목표 지점으로 진격하던 중, 영국군은 독일 제21기갑사단과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이 부대는 6월 6일 아침 내내 영국 공수부대를 추격한 뒤, 연합군 교두보에 대한 역습을 준비하며 진지를 구축하고 있던 참이었다.
치명적인 지연과 제12SS기갑사단의 등장
운명적으로도 영국군의 진격은 저지되었다. 캐나다군 역시 좌익이 노출될 것을 우려해 진격을 멈추었는데, 이 지연이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다음 날 다시 진격을 시도했을 때, 그들은 6월 6일 밤부터 7일 새벽 사이에 이 지역에 도착한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와 재차 조우하게 된 것이다.
독일군은 기지를 발휘해 캐나다 제9보병여단과 이를 지원하는 전차 부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그럼에도 승리를 완성하고 캐나다군을 바다로 몰아내려는 독일군의 역습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제12SS기갑사단은 나흘 동안 적진 돌파를 시도했지만, 캐나다군이 새 병력으로 증원된 데다 어디에나 나타나는 연합군 항공력이 독일군의 어떠한 기동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막대한 손실만 입고 실패하고 말았다.
인접한 독일 제716보병사단이 궤멸되어 보병 지원마저 부족해지자, 필사적인 상황에 놓인 제12SS기갑사단은 방어로 전환해 적을 감시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서쪽에서는 독일 최정예 '레르(Panzer Lehr)' 기갑사단이 '골드' 해안의 영국 교두보 제거를 시도했지만, 노르망디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 기갑 부대임에도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한편 영국 제6공수사단은 6월 6일 새벽 일찍부터 캉 동쪽에서 공수 작전을 감행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오른 강의 베누빌(Bénouville) 다리를 통해 연합군 교두보와 접촉하는 데 성공했고, 영국 제1군단의 포병과 지원 함정의 중포 화력에 힘입어 독일군 제2방어선을 위협하며 교란 작전을 펼쳤다.
두 번째 시도
제3보병사단의 공격으로 캉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자 몽고메리는 도시 양 측면에서 기동하기로 결심했다. 영국 제30군단이 서쪽에서 주공을 담당하고, 제51보병사단은 도시 동쪽 공수부대가 장악한 지역을 통해 출격하는 계획이었다.
제30군단의 선봉은 유명한 '사막의 쥐들(Desert Rats)' 제7기갑사단으로, 이들이 영국군 공세의 서쪽 갈고리를 형성했고, 경험이 풍부한 스코틀랜드 제51보병사단이 동쪽 갈고리를 담당했다.
계획상으로는 이 두 사단이 도시를 측면에서 포위하며 진격하고, 제1공수사단이 도시 남쪽에 투하되어 독일군 진지를 수직으로 우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몽고메리 참모부에서 공수부대 사용에 대한 강한 반대가 제기되면서 공수 작전은 취소되었고, 정작 공격 계획 자체는 별다른 수정 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공격은 실제로 6월 11일 동쪽에서 제51보병사단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숙적이었던 제21기갑사단에게 특히 큰 손실을 입으며 격퇴되었다. 전장에서 단련된 스코틀랜드 병사들은 이후 이틀에 걸쳐 새로운 공격을 시도했지만, 아프리카 군단(Afrika Korps) 참전 용사들과 그 후계자들에게 또다시 밀려나고 말았다.
서쪽 공세 축에서는 제7기갑사단이 초기에는 심각한 저항 없이 진격해 6월 13일 선발 부대가 빌레르보쿠아지(Villers-Bocage)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이들은 SS 제101중기갑대대 2중대의 티거 I 전차들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독일군의 이번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바로 전차 에이스 미하엘 비트만(Michael Wittmann)이었다. 이후 공세는 무위로 끝났다.
결국 캉은 연합군이 계획했던 D-Day 당일에 함락되지 못했고, 이 도시를 둘러싼 공방전은 1944년 7월 초까지 이어지며 노르망디 전역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