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도미니크 부르기뇽, 통칭 카르투슈(Cartouche)는 1693년에 태어나 1721년 11월 28일 처형된 인물로, 18세기 초 파리를 휩쓸던 '기적의 광장(Cours des Miracles)' 갱단의 수괴였습니다. 기적의 광장은 당시 강도와 거지들이 소굴로 삼던 빈민가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집시들 사이에서 자란 소년
파리 쿠르티유 지역의 포도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카르투슈는, 아버지가 독일 출신이었기에 본명은 '가르타우젠(Garthauzen)'입니다. 그는 대학에서 잠시 공부했으나 퇴학당했고, 11세 때 정직함을 몹시 중시하던 아버지의 호된 질책을 받고 집을 나섰습니다. 이후 그는 집시 무리에게 거두어졌고, 그곳에서 카드 놀음과 점술, 그리고 좀도둑질로 돈을 버는 요령을 익혔습니다.
어린 나이부터 범법의 길에 들어선 그는 빠르게 이름을 알렸고, 노르망디 지방에서 강도단을 이끌며 유명해졌습니다. 이후 발각되어 한동안 아르장송 경찰국장의 밀정으로 일하기도 했으며, 곧이어 군대에 입대했습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함께 복무했던 병사들을 새 갱단의 핵심으로 삼아, 수도에서 매일같이 강도와 살인을 자행하는 무리의 우두머리로 떠올랐습니다.
카르투시앵 갱단의 조직과 세력
갱단에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자 했던 카르투슈는 부하들 앞에서 감탄을 자아낸 연설을 통해 두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조직은 두 개의 범죄 집단으로 운영되었는데, 하나는 그의 직속 지휘 아래, 다른 하나는 그뤼튀스 뒤 샤틀레(Gruthus du Châtelet)의 지휘 아래 있었습니다.
'카르투시앵(cartouchiens)'이라 불린 이 무리는 다양한 출신의 인물들을 규합했는데, 그중에는 섭정의 첫 시종의 가족 일원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카르투슈는 범죄로 얻은 수익의 일부를 민중에게 재분배했기 때문에, 빠르게 대중의 일정한 호감과 존경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잔혹하기도 했습니다. 배신할 기미를 보인 한 공범은 부하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뒤 그의 명령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카르투슈는 놀라운 수완으로 모든 추적을 따돌렸고, 결국 그를 체계에 넘겨주는 자에게 현상금이 걸리기에 이릅니다.
당국의 그림자, 마차 습격의 악명
일부 저자들은 그의 공범 중 일부의 신분이 높았다는 점을 들어, 카르투슈가 당국에 의해 조종당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에 관해서는 질 앙리(Gilles Henry)의 저서 『카르투슈, 섭정기의 강도』를 참조할 만합니다.
이 갱단은 특히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오가던 마차 습격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것이 1777년 해당 도로에 가로등이 설치된 이유 중 하나였다고 전해집니다.
배신, 고문, 그리고 비극적 최후
1721년 1월 6일, 카르투슈는 공범 그뤼튀스의 밀고로 벨빌의 선술집 '피스톨레(Pistolet)' 간판 아래에서 체포됩니다. 샤틀레 감옥에 갇혔다가 콩시에르제리로 이감된 그는 '특별 심문'이라 불린 고문 속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형 당일, 자신을 구출하겠다고 맹세했던 동료들이 나타나지 않자, 분노와 원통함에 못 이겨 많은 사실을 실토하고 여러 사람을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진술로 인한 재판은 1723년까지 이어졌으며, 350명이 넘는 사람들이 갱단 두목과의 연루 혐의로 투옥되었습니다.
카르투슈는 1721년 11월 28일 파리 그레브 광장에서 팽형(차륜형)에 처해졌습니다.
전설이 된 무법자
그의 이야기는 이후 수천 가지 형태로 재탄생되었고, 여러 차례 무대에도 올랐습니다. 니콜라 그랑발(Nicolas Grandval)은 1725년 『카르투슈 또는 응징당하는 악덕(Cartouche ou le Vice puni)』이라는 제목의 시를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민중의 영웅이자 잔혹한 범죄자라는 양면성 덕분에, 카르투슈는 오늘날까지 프랑스 대중문화 속에서 회자되는 전설적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