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년 4월 25일~1658년 9월 3일)은 영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잉글랜드(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포함)에서 공화정인 커먼웰스(Commonwealth)를 수립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에 오른 인물로 기억된다. 그는 왕당파를 격파한 '신형군(New Model Army)'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으며, 1649년 찰스 1세 처형 후 커먼웰스 정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를 정복하고 16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호국경으로 통치했으며, 말라리아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출생과 가문
크롬웰은 1599년 4월 25일 헌팅던의 크롬웰 하우스에서 로버트 크롬웰(1560년경~1617)과 엘리자베스 스튜어드(†1654)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에는 헨리 8세 시절 실세였던 토머스 크롬웰의 누이 캐서린 크롬웰(1482년경 출생)이 포함되어 있다. 캐서린은 웨일스 출신 모건 압 윌리엄스와 결혼했는데, 그의 증조부가 오웬 튜더라고 전해져 크롬웰은 튜더 왕가와 먼 친척 관계이자, 숙적인 스튜어트 왕가와도 먼 사촌 관계가 된다. 할아버지 헨리 크롬웰은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고 헌팅던셔 주의 기사 의원으로 하원에서 활동한 유력 인사였다.
이러한 가문에도 불구하고 크롬웰 집안은 당시 젠트리(향신) 계층의 하위권에 속했다. 로버트 크롬웰의 재산은 헌팅던의 집 한 채와 주변 토지 정도였으며, 연간 소득은 최대 300파운드에 불과했다.
청년기와 교육
크롬웰은 1610년경 헌팅던 문법학교에 다닌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후 케임브리지의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이 대학은 엄격한 청교도 교리를 표방한 신생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1617년 부친이 사망하자 학위를 받지 못한 채 중퇴해야 했다. 여러 전기 작가들은 그가 이후 런던의 법조 양성소인 링컨즈 인(Lincoln's Inn)에서 공부했을 것으로 보지만, 기록에는 그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조부, 부친, 두 숙부 모두 링컨즈 인 출신이고 아들 리처드도 1647년 입학시켰다는 점에서 올리버 역시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반면 존 모릴은 홀어머니가 미혼인 일곱 딸을 돌보느라 올리버가 헌팅던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혼과 가족
1620년 8월 22일, 크롬웰은 런던의 세인트 자일스 위드아웃 크립플게이트 교회에서 엘리자베스 버치어와 결혼했다. 이 교회가 런던에 있다는 점은 그가 실제로 링컨즈 인 등 런던의 법조 기관을 드나들었음을 뒷받침하는 정황이 된다. 장인 제임스 버치어 경은 런던의 가죽 상인으로 에식스에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지역 청교도 젠트리와 교분이 두터웠다. 이 혼인으로 크롬웰은 올리버 세인트존 등 영향력 있는 런던 부르주아 인사, 워윅 백작과 홀랜드 백작 등 유력 귀족과 연결되었으며, 이 인맥은 훗날 그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부부 슬하에는 아홉 자녀가 태어났으며, 그중 리처드 크롬웬은 부친 사후 호국경을 계승했고, 헨리 크롬웰은 아일랜드 총독을 지냈다.
위기와 유산: 의회 진출과 내전 발발
1628년 크롬웰은 하원 의석에 올랐다. 동료 의원 필립 워윅 경은 그에 대해 "열정적인 웅변으로 말했지만, 그 이유는 타당치 않았다. 여왕을 비방한 유인물을 돌린 하인을 옹호하더군. 이 신사가 받는 관심 덕분에 이 위대한 의회에 대한 내 경외심이 크게 줄었다"고 혹평했다.
1629년 의회가 해산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산을 관리했다. 1640년 장기의회( Long Parliament)에서 케임브리지 대학 의원으로 활동하며 가톨릭과 왕정에 맞선 연설로 주목받았다. 1642년 1월 내전이 터지자, 그는 이를 주교제와 청교도 문제에서 벗어난 군주제에 맞선 신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1차 영국 내전(1642~1646) 발발 전까지 그는 젠트리 계층의 농장주로 살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직접 병사를 모집해 의회 편에 섰으며, 탁월한 지휘 능력과 용맹함, 동시에 잔혹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전후 정치 무대에서 그는 찰스 1세 사후 정국을 이끌 유일한 인물로 부상했다.
일각에서 크롬웰과 프리메이슨의 연관성을 제기하기도 하나, 이는 소수의 허황된 가설로 치부된다.
군사·정치 경력의 절정
기병대 조직과 마스턴 무어 전투
1642년 여름, 크롬웰은 1638년 상속받은 유산으로 기병대 한 부대를 자비로 편성했다. 이 부대는 장교를 병사들이 선출하고 이념 토론을 벌이는 등 민주적 원칙으로 운영되어 '아이언사이드(Ironsides, 철기대)'라 불렸다. 1643년 의회는 그를 대령으로 파격 승진시켰고, 토머스 페어팩스 경 휘하에서 1644년 7월 2일 마스턴 무어 전투와 10월 뉴버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의회는 그를 기병 중장으로 임명했다.
신형군 창설과 네이즈비 전투
1645년 의회는 크롬웰에게 자신의 부대 모델로 군대를 재편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이 유명한 '신형군'이다. 그는 1645년 6월 14일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파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찰스 1세 처형과 공화정 선포
1646년 5월 5일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군에 항복하고, 이듬해 1월 영국 의회에 인도되자 의회군은 '독립파'(장교 중심)와 '수평파'(병사 중심)로 분열했다. 평등주의를 표방한 수평파의 생각에 크롬웬은 처음엔 동조했으나, 1648년 찰스 1세가 와이트 섬으로 도주했다 붙잡혀 오자 의회가 합법적 군주를 재판하길 주저하자 '프라이드 숙청(Pride's Purge)'으로 반대파를 축출했다. 1649년 1월 20~27일 재판 끝에 1월 30일 찰스 1세가 도끼형으로 처형됐다. 그의 최측근 에드워드 휠리가 사형장에 서명했다.
아일랜드 정복과 드로헤다 학살
신형군의 가장 성공적인 포위전 중 하나는 1649년 드로헤다 포위전으로, 크롬웰의 가톨릭 아일랜드 정복 작전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은 아일랜드 집단 기억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호국경 취임과 독재 정치
1649년 5월 19일 크롬웰은 공화국(커먼웰스) 수립을 선언했다. 그러나umpf 의회(Rump Parliament, 잔부 의회)와 군부 사이 갈등이 깊어지자, 1653년 4월 20일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자, 나 혹은 주님께서 충분히 참았다. 네놈들의 잡담을 끝내주마. 너희가 더 이상 여기에 앉아 있는 건 이 나라들의 이익도, 공공의 선도 아니다. 내가 이 의회를 해산한다"는 유명한 연설과 함께. 한 익명 인사가 회의실 문에 "가구 없는 방, 세 놓음"이라는 팻말을 붙여 조롱했다.
이후 '성도 의회(Barebone's Parliament)'라 불리는 청교도 엄격주의 의회를 잠시 소집했다가, 1653년 12월 16일 장교 회의와 국무회의 추대로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아일랜드 호국경에 올랐다. 권한은 의회와 국무회견이 견제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국무회의는 그의 수중에 들어왔고 의회는 해산됐다.
크롬웰은 청교도적 금욕 정치를 펴며 가톨릭을 제외한 일정한 종교 관용을 베풀었으나, 아일랜드 진압 과정에서 벌어진 잇단 학살은 오늘날까지 아일랜드인들의 증오를 사고 있다.
유대인 귀환 허용과 대외 원정
1656년 마나세 벤 이스라엘의 건의로 1290년 에드워드 1세의 유대인 추방 칙령을 폐지, 유대인 공동체의 잉글랜드 귀환을 허용했다.
같은 해 자메이카에서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전비 마련 차 새 의회를 소집했으나 열흘 만에 해산시켰다. 1658년 세 번째 의회가 소집되어 전비를 승인하고 그에게 왕위 수락을 청했으나, 장교들의 압박으로 거절하고 아들 리처드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658년 2월 4일 의회를 최후로 해산했다. "이 모든 건 스코틀랜드 왕의 손에서 놀아나는 꼴이다. 혼란과 피만 남을 뿐이다. 이제 네놈들의 회기를 끝낼 때다. 신께서 우리 사이를 심판하시리라."
이후 크롬웰은 절대적 권력을 행사했다. 스페인으로부터 자메이카를 탈취하고 네덜란드 해군을 격퇴했으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완전한 평정을 마무리했다.
사후와 왕정 복고
딸 베티의 죽음 한 달 뒤인 1658년 9월 3일, 크롬웰은 말라리아로 악화된 요로 감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됐다.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계승했으나 단명했다. 스코틀랜드 총독 조지 몽크 장군이 혼란을 우려해 왕정 복고를 추진, 1660년 2월 군대를 이끌고 런던에 진입해 대중 지지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1661년 4월 23일 찰스 2세가 대관식을 치르며 왕정 복고(Restoration)가 완성됐다.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찰스 2세는 시해자들을 처단했고, 크롬웰의 시신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파내어 1661년 1월 30일(찰스 1세 기일) 사후 참수형에 처해졌다. 시신은 구덩이에 던져지고 머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 말뚝에 꽂혀 1685년까지 전시됐다. 우여곡절 끝에 머리는 1960년 2월 12일 모교인 케임브리지 시드니 서섹스 칼리지에 안장됐다.
주요 업적과 평가
왕립 해군의 태동
내전 발발 당시 35척이던 의회 해군은 1652년 102척으로 급증했다. 전술과 무장이 발전해 전열 전투(line of battle)가 도입되었고, 함대는 제독·부제독·후위 제독이 지휘하는 세 편대로 나뉘었다. 로버트 블레이크 제독 등 명장 지휘하에 네덜란드 전쟁에서 위력을 입증했다. 1661년 찰스 2세 즉위 시 함대 규모는 154척에 달했으며, 왕은 함대 명칭을 '왕립 해군(Royal Navy)'으로 바꾸고 새뮤얼 피프스를 해군 본부장으로 임명해 해군성을 정비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두 차례 전쟁(1664, 1674)을 치렀으며, 피프스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가 실각하며 해임됐다.
카리브해 가톨릭·스페인 식민지 공격
1655년 윌리엄 펜 제독이 스페인령 에스파뇰라 섬 정복에 실패했으나 자메이카를 점령, 모든 국적의 사략선 기지로 삼고 스페인 선박을 공격했다. 크롬웬은 1648년 끝난 네덜란드-스페인 전쟁을 연장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스튜어트 왕조 복고 후 영국은 네덜란드와 적대하게 된다. 네덜란드가 담배 무역을 지원해 설탕 산업 성장을 저해한다는 이유였다. 첫 전쟁(1664)은 엘리자베스 1세 시기 영국 해적(시 독), 위그노 사략선, 네덜란드 게으즈가 스페인이라는 공동의 적(당시 유럽 최강국이자 가톨릭 수호자)과 싸우던 구도와 정반대였다.
크롬웰 시절 해군력은 대규모 조선 사업으로 증강되어 가톨릭이 지배하던 바베이도스 섬을 봉쇄하고, 막대한 세금과 수출 독점권을 부과해 막 떠오르던 설탕 산업의 성장을 둔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