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정치적 배경
카리브해에서 해적 행위가 성행한 것은 강대국들의 판치기가 낳은 결과였습니다. 16세기 카리브해는 삼각 무역의 중심지로서 세계 해상 무역의 요충지였습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스페인의 독점
토르데시야스 조약(1494년)은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370리그(약 1,770km) 지점을 지나는 남북 방향의 선을 기준으로 신대륙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나누었습니다. 이로써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고, 교황 칙서를 통해 그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당시 카리브해 주변 대륙은 '누에바 에스파냐(New Spain)'라 불렸으며, 최초의 주요 항구로는 카르타헤나, 파나마, 산티아고, 포르토벨료, 산토도밍고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스페인인들은 누에바 에스파냐와 페루의 광산을 개발해 막대한 양의 은괴를 채굴했습니다. 그 외의 무역은 본질적으로 가죽 거래가 중심이었는데, 스페인인들이 플랜테이션 농업보다 목축업을 선호했기 때문입니다.
'라 플로타' 호위 선단과 해적의 표적
은화의 운송은 카리브해는 물론 대서양을 건너 세비야까지 해적과 사략선들을 끌어들였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스페인은 1560년부터 호위 선단 제도인 '라 플로타(la flota)'를 도입했습니다. 이 호위 선단은 다수의 상선과 수많은 군함을 한데 묶어 어떠한 해적 공격에도 대비할 수 있게 했습니다.
선단은 매년 세비야(후에는 카디스)에서 출발하여 구대륙의 승객, 군대, 물자를 신대륙의 식민지로 실어 나랐습니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 이러한 왕복 항해는 단순한 밸러스트에 불과했습니다. 진정한 목적은 유럽으로 1년 치 은 생산량과 화폐를 실어 나르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귀항 항해는 해적들에게 최고의 표적이었고, 해적들은 은밀히 선단을 뒤따르다가 대열에서 뒤처진 배들을 공격했습니다.
전형적인 카리브해 항로는 누에바 에스파냐 인근 소앤틸리스 제도에서 시작해 북상하여 유카탄 해협(멕시코와 쿠바 사이)을 통과한 뒤, 강한 편서풍을 이용해 유럽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열강의 도전과 '자오선 너머에는 평화 없다'
잉글랜드는 1533년 헨리 8세가 카를 5세의 이모인 아라곤의 캐서린을 폐위하고, 이듬해인 1534년 성공회 분열을 일으킨 이래 스페인과 갈등을 빚어왔습니다. 1566년부터 스페인에 반란을 일으킨 네덜란드 연합주 역시 신대륙에서의 이베리아 독점에 도전할 결의를 굳혔습니다.
프랑스 역시 프랑수아 1세의 입을 빌려 오랫동안 스페인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담의 유언장에서 나를 세계 분할에서 제외하는 조항이 있는지 보고 싶군." 그러나 이 왕은 주로 캐나다(자크 카르티에)와 오늘날의 뉴욕(베라차노의 '누벨 앙굴렘')으로 탐사대를 파견했습니다. 베라차노는 서인도 제도 원정 중에 행방을 감추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의 손자들, 특히 샤를 9세 시대에는 식민지 개척 시도가 주로 위그노(개신교도)들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브라질의 빌레가뇽과 미국 남부가 대표적인 사례이며, '캐롤라이나'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프랑스인은 카리브해에서 최초로 식민지를 가진 비(非)스페인 국민이 되었는데, 그곳은 세인트어거스틴(플로리다)이었으나 존속 기간은 짧았습니다.
각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상인과 정착민들은 조약을 무시하고 스페인 영토를 침범했습니다. "자오선 너머에는 평화 없다(No peace beyond the line)"는 격언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스페인은 이 지역을 통제하거나 자국의 무역법을 집행하기에 충분한 군사력을 유지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평시에는 만성적인 밀수와 식민지화가, 전시에는 카리브해 전역에서 해적 행위가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쟁 이후의 변화
1620년대, 30년 전쟁(1618~1648)이 시작된 후 스페인의 카리브해 내 존재감은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스페인은 점차 아프리카 노예 노동력에 의존하게 되었고, 군사적으로는 소규모 주둔만을 유지했습니다. 한편 다른 나라들은 스페인이 사실상 내팽개친 영토에 식민지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바베이도스는 최초로 진정으로 번영한 영국 식민지였으며, 뉴프로비던스 섬에 세워진 또 다른 식민지는 곧 해적들의 피난처가 되었습니다.
유럽에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17세기 말에 이르러 카리브해의 상황은 안정기를 맞았습니다. 식민지들은 더 커졌고 해적 행위가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존재감이 한층 커진 잉글랜드는 1680년대부터 포트로열(자메이카)에 해군 분견대를 주둔시켰습니다. 해적 행위는 드물어지고 해적 사냥은 더욱 강도 높아졌으며, 스페인 역시 해안경비대(Costa Guarda)라 불리는 사략 조직을 운영했습니다.
사회학적 배경
선원이라는 직업의 참혹한 현실
17세기와 18세기에 선원의 처지는 그 어떤 직업보다 험난했습니다. 노동은 육체적으로 극도로 고되었고, 생활 공간은 좁고 악취가 났으며, 식량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선원이라는 직업은 수많은 위험도 품고 있었습니다. 조작 사고, 폭풍, 질병, 영양실조, 식량이나 식수의 상실 등은 선원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무수한 가능성이었습니다.
배에 팔려 들어간 젊은이들이나 강제로 징발된 사람들(영국 특유의 '프레스 갱'이라 불린 강제 징집)은 스스로의 의지로 선상에 올라 이 모든 고통을 견디겠다고 선택한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거의 권리가 없는 체제 속에서 복무해야 했습니다. 체벌을 포함하고 사형에 이를 수도 있는 철권 통치가 그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선원들은 선주와 상인에게 상당한 이익을 안겨주었음에도 사회적 지위의 최하층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해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
서인도 제도에서 취약한 제도적·사회적 권력 구조는 반란의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해적 생활의 선택은 개인적 부를 축적하려는 직업 선택이라기보다는 당대 사회와의 단절이었습니다. 해적들이 장교들을 잔혹하게 처벌하거나 죽이는 반면 일반 선원들은 흔히 살려주었다는 기록에서 보듯, 해적 선원들의 민주적 조직 운영은 당대 사회 규범에 대한 도전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단순한 약탈과 발부의 문제가 아니라 불의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해적 선원들은 1년도 되지 않는 짧은 경력을 가진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반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은,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남자들이었고, 이 때문에 전투에서 특히 무시무시한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