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제1대 콘월리스 후작)는 1738년 12월 31일 런던 그로브너 스퀘어에서 태어나 1805년 10월 5일 인도 북부 가지푸르(Ghazipur) 근처 가우스푸르에서 생을 마감한 영국의 장군이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 당시 요크타운 포위전에서 영국군을 지휘한 인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이후 인도 총독(1786~1793)과 아일랜드 총독(1798~1801)을 역임했으며, 아미앵 조약(1802) 체결 당시 영국 측 수석 협상가로 활동했다.
유년기와 군 입문
콘월리스는 제5대 콘월리스 남작 찰스의 장남으로, 이튼(Eton)과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았다. 1757년 소위(Ensign)로 임관한 뒤,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군사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7년전쟁이 발발하자 영국군에 합류하여 민덴, 빌링하우젠, 빌헬름스탈, 루첼베르크 전투와 카셀 공성전 등 주요 전역에 참전하며 군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정치 경력과 인지세법 반대
1760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762년에는 상원(귀족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흥미롭게도 훗날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군을 지휘하게 될 그는, 1765년 인지세법(Stamp Act)에 반대표를 던진 다섯 명의 의원 중 한 명이었다.
1768년에는 제미마 툴레킨 존스(Jemima Tullekin Jones)와 결혼하여 슬하에 남녀 한 명씩 두 자녀를 두었으나, 아내 제미마는 1779년 세상을 떠났다.
미국 독립전쟁과 요크타운의 패배
1775년 소장, 1777년 중장으로 승진한 콘월리스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반군 진압 작전의 핵심 역할을 맡았다. 1780년 8월 16일 캠던 전투에서는 호레이쇼 게이츠(Horatio Gates) 장군이 이끄는 미군을 대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781년 9~10월에 벌어진 요크타운 전투에서 조지 워싱턴과 로샹보(Rochambeau) 장군의 연합군, 그리고 드 그라스(De Grasse) 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의 지원까지 받은 연합군에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이 전투는 전쟁의 승패와 미국 독립을 사실상 결정지었으며, 그 결과는 1783년 파리 조약으로 공식 비준되었다.
인도 총독 시절과 콘월리스 법전
요크타운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콘월리스의 정치적 신뢰는 유지되었다. 그는 인도 총사령관 겸 벵골 총독으로 임명되어 '콘월리스 법전(Cornwallis Code)'으로 알려진 일련의 행정·사법 개혁 규정을 시행했다. 또한 마이소르 전쟁 중 세 번째 전쟁에서 티푸 술탄(Tipu Sultan)의 군대를 격파하며 영국의 인도 지배를 공고히 했다.
아일랜드 총독과 아미앵 조약
아일랜드 총독 겸 총사령관으로 재임하던 1798년 8월, 그는 프랑스의 침공 시도를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후 아일랜드와 그레이트브리튼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해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탄생시킨 연합법(Act of Union, 1800) 통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조지 3세가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자, 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이후 전권대사(Minister Plenipotentiary) 자격으로 영국 대표단을 이끌며 협상을 주도했고, 그 결과 1802년 3월 25일 아미앵 조약(Peace of Amiens)이 체결되었다.
말년과 죽음
콘월리스는 다시 인도로 건너갔으나, 1805년 가지푸르 근처 가우스푸르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묘는 오늘날에도 그곳에서 볼 수 있다.
그가 남긴 서한들은 찰스 로스(Charles Ross)가 3권의 책으로 엮어 1859년 런던에서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