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유럽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한 고대 도시 로크로이, 탈출한 노예들이 여주인과 함께 세웠다?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 해안에 자리한 오늘날의 로크리(Locri) 마을은, 기원전 8세기 코린토스만 북쪽 로크리스(Locris) 지방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세운 고대 그리스 도시 로크로이(Locroi)가 서 있던 자리다.

건국 신화, 노예와 여주인들의 이야기?

스트라본(Strabo)은 이들이 문자 그대로 ‘악취 나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오졸리아 로크리스인(Ozolian Locrians)으로, 크리사만에서 에반토(Evanto)라는 오키스테스(식민 원정 지도자)가 이끌고 왔다고 기록했다. 반면 폴리비오스(Polybius)는 이들이 동부 로크리스인, 즉 크네미스산 기슭에 살던 에픽네미디아인(Epicnemidians) 혹은 수도 오푼티아(Opuntia)에서 유래한 오푼티아인(Opuntians)이었다고 주장했으며, 베르길리우스 역시 같은 견해를 밝혔다.

그런데 폴리비오스는 여기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덧붙인다. 바로 이 도시가 제1차 메세니아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주인들의 아내들과 함께 도망친 노예들이 세웠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이 10년째 계속되자, “메세니아를 정복하기 전에는 결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스파르타인들은 후손이 끊길까 걱정하여 가장 어린 병사들을 번식을 위해 도시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도 같은 맹세에 묶여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맹국인 로크리스인들에게는 같은 특권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럽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한 고대 도시 로크로이, 탈출한 노예들이 여주인과 함께 세웠다?

물론 폴리비오스가 이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니다. 그는 다름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이를 인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저작 『로크리 헌법』에서 이 이야기를 언급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가 이를 널리 인용함으로써 후대에 전해졌다. 아마도 이 건국 설화는 로크로이에서 귀족 신분이 모계를 통해 전승되었다는 사실, 즉 식민 도시의 과두정치를 유지해 온 백 개의 원래 가문에서 어머니를 통해 혈통이 이어졌다는 관습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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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포이 신탁과 두 차례의 정착

로크리스인들은 식민 원정에 앞서 항상 그랬듯 델포이 신탁의 지시를 따라, 현재 브루차노 제피리오(Bruzzano Zeffirio) 지역에 해당하는 케피리오 곶 인근에 첫 정착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스트라본에 따르면 3~4년 뒤 그들은 이곳을 떠나 북쪽으로 20km 이동했다. 그리고 이오니아해와 게라체 강, 포르티글라 강 사이의 지역, 에소피스(Esopis)라 불리는 언덕 위에 최종 도시인 에피제피리아 로크로이(Λοκροί Ἐπιζεφύριοι)를 세웠다.

잘레우코스, 유럽 최초의 성문법을 만들다

그로부터 한 세기 뒤인 기원전 7세기, 입법자 잘레우코스(Zaleucus)는 로크로이에 그리스 문명 최초의 성문법전을 부여했다. 당시까지 그리스 본토의 어떤 도시에서도, 섬에서도, 남부 이탈리아의 대그리스(Magna Graecia) 지역에서도 이에 필적하는 입법 체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크로이의 법전은 유럽 전역에서 최초로 성문화된 법률이기도 하다.

유럽 최초의 성문법이 탄생한 고대 도시 로크로이, 탈출한 노예들이 여주인과 함께 세웠다?

전설로 둘러싸인 입법자

잘레우코스는 거의 신화적 인물로, 그의 삶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사료들은 서로 모순된 이야기를 전한다. 피타고라스의 제자였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는 한 세기의 시간 차가 존재하며, 노예 출신의 목자였다는 설도 있다.

스트라본이 인용한 에포로스(Ephorus)에 따르면, 잘레우코스는 크레타와 스파르타, 아테네 아레오파고스의 규범을 참고해 자신의 법률을 구성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이른바 ‘로크리 법전(Locrian Code)’으로,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효력을 유지했으며 그 영향력은 크로톤(Croton), 시바리스(Sybaris) 같은 인접 도시, 때로는 적대 도시에까지 미쳤다.

목에 밧줄을 두르고 법을 제안하다

법전에는 독특하고 엄격한 조항들이 담겨 있었다. 예컨대 자유 여성은 술에 취한 경우가 아니라면 노예 둘 이상과 동행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연인을 만나러 가는 경우가 아니면 밤에 도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물로 희석하지 않은 포도주를 마시는 행위 역시 의학적 목적 외에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유명한 규정은 단연 이것이다. 새로운 법률을 제안하거나 기존 법률을 수정하고자 하는 자는 목에 올가미를 두른 채 시민평의회 앞에 나서야 했다. 평의회가 안건을 기각하면 그 밧줄은 즉시 제 기능을 발휘했다. 데모스테네스에 따르면, 이 규정 덕분에 200년 넘는 세월 동안 단 하나의 새로운 법률만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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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으로만 남은 법전

오늘날 잘레우코스 법전은 단 14개의 단편으로만 전해진다. 어떤 조각에는 처벌 규정이, 어떤 조각에는 금지 조항이 담겨 있다. 검을 들고 민회에 참석하는 행위, 스스로 생산하지 않은 식량을 판매하는 행위, 먼 나라에서 온 신기한 물건을 들여오는 행위, 화해를 시도하지 않은 채 법정에 나가는 행위 등이 모두 금지 대상이었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기괴하고, 지나치게 비례하지 않고, 때로는 유감스러운 조항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분명 유럽에서 최초로 성문화된 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몰락, 그리고 재발견

로크로이는 기원전 215년부터 로마의 동맹 도시였다. 이후 중세에 아랍 세력의 침공이 잇따르자 주민들은 더 높은 지대에 있어 방어에 유리한 게라체(Gerace)로 피신했다. 7세기 무렵이면 로크로이 도시는 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다 19세기 말 고고학 발굴이 시작되면서 잊혔던 고대 도시의 유적이 하나둘 빛을 되찾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