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미국 연방의 탄생(1777~1781): 연합규약에서 헌법 제정까지

통일을 향한 첫걸음

미국 연방의 탄생(1777~1781): 연합규약에서 헌법 제정까지
1777년, 미국의 통일은 눈에 띄게 진전되었습니다. 그해 6월에는 국기가 채택되었으며, 영국에 맞서는 군사 작전의 조율과 대륙군(Continental Army)에 대한 보급 문제는 각 식민지가 하나로 뭉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전쟁 자금 조달과 채무 상환 역시 더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요구했습니다. 독립전쟁은 바로 이전 식민지들을 한데 모으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연합규약의 채택

1777년 11월 15일,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는 '연합규약(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채택했습니다. 이 헌법 문서는 13개 주를 하나의 연합체로 조직하면서도,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를 선언하는 동시에 주권은 개별 가입 주에 남겨두었습니다. 연합극약은 상호 무력 지원 의무를 부과하고, 국제 관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선출된 회의를 두었으며, 주 간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도 담당했습니다.

이후 미국은 대사관, 국고, 은행을 갖추게 되었고, 귀족 칭호는 폐지되었으며 최초의 부처들이 설치되었습니다. 다만 연합규약은 각 주의 비준을 받아야만 효력을 발휘했고, 실제 발효된 시점은 1781년 3월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의의 재정 수입은 대부분 각 주의 선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공공 덕성'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해 회의가 각 주에 권위를 행사할 장치를 마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식민지 인구 250만 명 중 영국군과 싸우기 위해 자원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또한 각 주는 대륙군 병력에 대한 보급품과 군복 제공을 거부했고, 병사들은 굶주림과 옷가지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연합규약을 마련하는 과정에서는 상대적으로 강한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입 주들의 상당한 자치를 원하는 세력 간에 대립이 벌어졌습니다. 전자는 처음에 '내셔널리스트(nationalists)'로 불리다가 이후 '연방주의자(federalists)'로 명명되었습니다. 논쟁은 또한 조세 부담의 분배, 표결 방식, 서부 확장 등을 놓고도 벌어졌습니다.

연합 시대(1781~1789)

1781년부터는 제2차 대륙회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회의가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의회의 구성원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회의의 관할 권한은 직위, 도량형, 화폐, 시민권 등으로 매우 제한적이었습니다. 1785년에는 달러(dollar) 화폐가 제정되어 영국 파운드를 대체했는데, 특히 북아메리카에서 유통되던 각종 외국 화폐들, 그중에서도 스페인 제국의 유명한 은화 '레알 8조각(piece of eight)'을 대체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전쟁 이후에도 지폐 발행은 계속되었습니다.

서부 확장

파리 조약에 따라 미국에 할양된 애팔래치아산맥 서부의 영토는 각 주 간 경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1784년, 어수선하고 젊은 국가의 통일을 위협하는 상황을 종식시키기 위해 토머스 제퍼슨은 해당 지역을 10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이 일정한 인구 규모에 도달하면 곧바로 연방의 주가 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1785년에는 회의가 토지를 타운십(township) 단위로 구분하여 공유지 매각에 나섰습니다. 1787년의 '북서부 조례(Northwest Ordinance)'는 준주 제도를 정비하고 해당 지역에서 노예제를 금지했습니다. 아울러 회의는 상속에 있어 자녀 평등의 원칙도 확립했습니다.

군사적·사회적 동요

파리 조약 이후의 시기는 경제 침체와 사회 불안으로 점철되었습니다. 1783년의 '뉴버그 음모(Newburgh Conspiracy)'는 군 내부의 긴장을 드러내며 제도 개혁의 시급성을 부각시켰습니다. 같은 해 6월에는 펜실베이니아 연대 출신 반란병 일단이 필라델피아의 회의장을 습격해 일부 대표들을 위협했고, 이들은 프린스턴으로 임시 피신해야 했습니다.

1786년부터 1787년 사이, 인플레이션, 재산세 인상, 화폐 가치 하락으로 혼란스러운 경제 상황 속에서 빚에 시달리던 매사추세츠의 농부와 장인들은 다니얼 섀스(Daniel Shays)가 이끄는 민병대를 조직해 법원을 위협했습니다. 매사추세츠는 회의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대부분의 주는 개별적인 이기심 때문에 반란 진압에 필요한 자원 동원을 거부했습니다. 섀스의 반란은 결국 1787년 1월 진압되었지만, 지배 엘리트층 사이에 민중에 대한 공포심을 조성했습니다. 버지니아에서도 이를 본떠 폭도들이 법원을 약탈하고 채무 흔적을 없애기 위해 기록물을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제임스 매디슨은 새로운 '크롬웰'이 등장해 '전제적' 정권이 수립될까 우려했습니다. 조지 워싱턴은 제임스 먼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인들이 젊은 국가에 대해 내린 평가가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두면 그들의 제도는 무너질 것이다." 섀스의 반란은 연방주의자들에게 제도 개혁을 요구하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인간 본성에 대해 너무 낙관적이었음을 깨닫고, 공공 덕성이 유토피아에 불과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해밀턴은 인간 본성을 더 현실적으로 정의하는 새로운 구상을 세우라는 위임을 받았습니다. 그의 창시적 성찰은 더 실용적인 사고방식으로의 전환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권력을 사랑한다. […] 다수에게 모든 권력을 주면 소수가 억압받고, 소수에게 모든 권력을 주면 다수가 억압받는다." 혼란이 너무 심해져 일부에서는 미국에 군주제를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건국의 아버지들은 공화국이 구현하는 자유의 이상을 위해 치른 수많은 희생을 생각하면 끝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공화정 통치의 가장 흔한 폐단에 대한 공화정적 처방"을 제시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헌법의 탄생

버지니아의 요청으로 1786년 9월 11일부터 14일까지 열린 애나폴리스 회의는 주 간 상거래 조직화에 관한 연합규약의 실패를 확인하는 문서를 작성했고, 1787년에 새로운 회의를 소집하기로 합의했습니다. 1787년 5월부터 9월까지 열린 필라델피아 제헌회의는 미국 헌법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55명의 대표들은 노예제, 권력 분립, 가입 주들의 정치적 비중 등을 놓고 활발히 논의했습니다.

헌법 초안은 1787년 9월 17일 채택되었으며, 55명 중 39명의 대표가 서명했고, 1788년 6월 21일 주(州)의 4분의 3이 이를 비준했습니다. 이 문서는 권력이 분립되고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ances)이 이루어지는 공화정·연방 국가의 새로운 제도를 확립했습니다. 이렇게 광대한 국가에 연방제가 적용된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가입 주들은 정치, 법률, 경제, 사회, 재정 권한을 계속 보유하면서도 연방법의 우위를 인정했습니다. 그 독창성은 공화정과 민주주의의 결합, 그리고 그때까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대통령제에 있습니다. 전문(前文)의 'We the People'(우리 국민)이라는 표현은 헌법이 하나의 국가 탄생을 공식화했음을 보여줍니다.

헌법이 타협의 산물이었던 만큼 반연방주의자들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주(州) 만장일치의 원칙을 포기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고, 실제로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3명의 대표는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노스캐롤라이나는 권리장전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788년 8월 1일 헌법 비준을 거부했다가 결국 1789년 11월 21일에 비준했습니다. 메릴랜드 법무장관 루터 마틴은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자신의 주를 대표하면서도, 노예제를 명시적으로 규탄하지 않는다며 1787년 헌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로드아일랜드는 1788년 주민투표에서 헌법을 기각한 후 1790년에야 찬성 34표 대 반대 32표로 간신히 비준한 마지막 주였습니다.

헌법은 주(州) 4분의 3의 비준으로 발효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1788년에 실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