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구한 노장, 쿠투조프

미하일 일라리오노비치 골레니시초프-쿠투조프(Михаил Илларионович Голенищев-Кутузов, 1745~1813)는 스몰렌스크 공작 작위를 지닌 러시아 제국의 원수다. 1745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1813년 4월 실레지아의 분츠라우에서 생을 마감한 그는, 차르 알렉산드르 1세 치세에 러시아 육군 총사령관을 맡았으며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대육군(그랑드 아르메)을 궤멸시킨 주역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열두 살에 군인의 길을 걷다
군공병 장교의 아들로 태어난 쿠투조프는 열두 살 무렵부터 군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759년에는 겨우 14세의 나이로 러시아 육군에 입대했다. 여섯 개 국어에 산술과 지리학까지 두루 익힌 그는 예카테리나 2세 치세 포병 부대에서 복무를 시작해 1764~1769년 폴란드 원정과 우크라이나 전역에 참전한 뒤, 1788~1792년 오스만 제국(터키)과의 전쟁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773년에는 총탄이 머리를 관통해 오른눈을 잃는 중상을 입었지만 요행히 목숨을 건졌고, 이후 스승이자 멘토였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 휘하에서 복무했다. 1788년에도 한 차례 사경을 헤매며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회복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마지막 전투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요새 공방전과 외교 무대
1788년 오차초프 공방전에서 쿠투조프는 굳건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터키 수비군의 맹렬한 출격 과정에서 위독할 정도로 중상을 입었지만, 이후 1790년 이즈마일 함락에도 크게 기여했다. 1791년 중장으로 승진한 그는 프루트 강, 드네스트르 강, 다뉴브 강 사이에 배치된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오스만 제국과의 강화 이후에는 우크라이나 사령관을 지냈으며, 예카테리나 2세 시대와 그 후계자 파벨 1세 시대에 걸쳐 여러 외교 협상에 참여했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 핀란드 총독,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관생도 군단장, 베를린 주재 대사, 상트페테르부르크 군정 장관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러나 파벨 1세 암살 음모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것이 화근이 되었는지, 파벨 1세 사후 즉위한 알렉산드르 1세는 그를 요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쿠투조프
1805년, 프랑스에 맞선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결성될 당시 쿠투조프는 이미 60세의 노장이었다. 술과 여색을 밝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누구나 그를 정중하고 교양 있으며 수완가로 인정했다. 알렉산드르 1세는 그에게 오스트리아를 지원해 나폴레옹에 맞설 임무를 맡겼고, 쿠투조프는 1805년 11월 뒤른슈타인에서 조제프 모르티에 원수의 프랑스군과 교전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앞두고 쿠투조프는 회전을 피하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전장에 함께 있던 차르는 그의 만류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결과는 참패였고, 옳은 말을 했다가 도리어 화를 입은 쿠투조프는 다시 한직으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1811년, 몰다비아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는 그가 강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 결과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에 따라 동몰다비아(베사라비아, 현 몰도바 공화국)가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공로로 그는 공작 작위와 국가평의회 의장, 원수의 지위에 올랐다.
1812년 러시아 원정: 보로디노에서 베레지나까지
프랑스가 러시아 침공을 감행하자 차르는 다시 쿠투조프에게 러시아군의 지휘권을 넘겼다. 쿠투조프는 러시아 국경에서 모스크바까지 약 2,000km 구간에 걸쳐 청야 작전을 펼쳤다. 패배하면 치명타가 될 대규모 결전을 끝까지 피하면서, 코사크 기병의 끊임없는 게릴라식 소요—마치 스페인의 게릴라전을 연상시키는 방식—속에서 20만 대육군이 모스크바로 접근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스크바 성문 앞에서 결전을 개시했으니, 이것이 바로 모스코바 전투, 즉 보로디노 전투다.
전투에서 패한 러시아군은 수도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프랑스군이 도착한 모스크바는 이미 버려진 도시였다. 나무로 지어진 이 도시는 9월 14일부터 20일까지 완전히 불타버렸고, 20만 대육군은 겨울을 날 피신처마저 잃었다. 이 화재가 프랑스군의 소행인지 러시아군의 소행인지 단정하기는 어렵다. 프랑스 약탈꾼과 러시아 약탈꾼, 양쪽의 손길이 모두 닿았을 가능성이 크다.
나폴레옹은 결국 10월 18일, 한겨울 러시아의 혹한 속에서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쿠투조프는 붕괴되어 가는 대육군을 뒤쫓으며 소부대를 동원해 끊임없이 괴롭혔다. 숫자가 용기를 압도했던 도로그부시 전투와 크라스노예 전투에서의 승리 덕분에 쿠투조프는 '스몰렌스키'라는 별칭과 성 게오르기 훈장 최고 등급을 받았다. 베레지나 강 도하 때에는 대육군의 잔존 병력이 간신히 그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말년과 죽음
이 원수는 1813년 초에도 러시아군을 계속 지휘했다. 그러나 수많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인한 패혈증에 시달리던 그는, 제6차 대프랑스 동맹 연합군의 지휘를 맡아 나폴레옹군에 대한 공세를 준비하던 중 1813년 4월 실레지아 분츠라우(현 폴란드 보이스와프)에서 세상을 떠났다.
역사가 남긴 평가
그의 서거지와 모스크바의 포클론나야 언덕, 그리고 그가 안장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대성당 앞에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직계 남성 상속자가 없었던 그의 재산은 톨스토이 가문으로 넘어갔다.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원수의 묘소를 추모하는 유명한 비가를 남겼으며, 레프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그를 총명하고 존경받는 지도자로 그려냈다.
나치 독일의 침공(1941~1945)에 맞서던 시기, 소련 정부는 '쿠투조프 훈장'을 제정했다. 소련 해체 후인 오늘날에도 이 훈장은 러시아에서 가장 높은 영예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스승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과 더불어 쿠투조프는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