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테벨로 전투는 1800년 6월 9일(혁명력 8년 프레리알 20일)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몬테벨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다. 란(Lannes)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선봉대가 오트(Ott) 부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과 맞붙어 승리를 거두었다.
전쟁의 배경
1800년 5월 말, 북부 이탈리아의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하던 멜라스(Melas) 장군은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예비군이 자신의 후방에 안길 위협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1집정관 보나파르트는 4만 명의 병력과 100문의 대포를 이끌고 대생베르나르 고개를 넘어 알프스를 돌파, 포(Po) 평야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5월 16일 아오스타를 점령했고, 6월 2일에는 밀라노에 입성했다.
결정적인 회전을 원했던 제1집정관은 6월 6일 벨조이오소에서 포 강 남안으로 건너가 전략적 요충지인 스트라델라 고개를 확보했다. 6월 9일, 그는 포고문을 낭독하며 전진을 선포하고 란 장군의 선봉대를 포게라(Voghera) 방면으로 파견했다. 선봉대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며 오스트리아군의 집결에 앞서기 위해 여러 차례 소규모 교전을 벌였다.
양측의 병력
프랑스군 – 란 장군
란 군단(8,000명)
- 와트랭(Watrin) 사단: 제6경보병연대, 제22선열연대, 제40선열연대
- 전위(마이오니 장군): 제28선열연대
- 배속 부대: 제12엽기병연대, 포병 2개 중대, 집정위 호위포병
빅토르(Victor) 군단(6,000명)
- 샹바를라크(Chambarlhac) 사단: 제24경보병연대, 제43선열연대, 제96선열연대
오스트리아군 – 오트 부원수
사단 지휘관: 포겔상, 셸렌베르크, 오렐리(총 16,000명)
- 라이스키 보병연대 제13(3개 대대), 스튜어트 보병연대 제18(3개 대대), 스플레니 보병연대 제51(3개 대대), 옐라치치 보병연대 제53(3개 대대), 요제프 콜로레도 보병연대 제57(3개 대대)
- 오토카너 그렌츠 보병연대 제2(1개 대대), 오굴리너 그렌츠 보병연대 제3(2개 대대)
- 로브코비츠 용기병연대 제10, 나우엔도르프 엽기병연대 제8, 대공 요제프 엽기병연대 제2
전투의 시작
란의 앞에는 초기에 오렐리 장군의 부대 약 6,000명만이 가로막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이 정도 병력으로는 프랑스군의 통과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한편 프랑스군 본대는 갑작스러운 홍수로 포 강을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란은 보나파르트로부터 멈추지 말고 토르토나와 포게라 방향으로 계속 전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6월 9일, 선봉대는 즉시 진격에 나섰다.
그러나 상황은 급변했다. 6월 4일, 마세나(Masséna) 장군이 격렬한 저항 끝에 제노바에서 항복한 것이다. 이로 인해 제노바에서 방향을 돌린 오트 부원수가 6월 8일 카스텔조(Casteggio)에서 오렐리와 합류하면서 오스트리아군은 약 16,000명으로 불어났다. 란은 5,000~7,000명의 병력으로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적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전투 경과
오스트리아군은 비엔나로 통하는 길을 열기 위해 피아첸차(Plaisance) 방면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오전 10시, 전위를 지휘하던 와트랭 장군이 산타 줄리에타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충돌하여 이들을 리베타까지 몰아냈다. 오트는 몬테벨로 남쪽 고지에 한 개 사단을 전개했고, 로브코비츠 용기병대는 더 북쪽에, 추가 대대들은 후방의 몬테벨로에 배치했다. 계곡을 내려다보는 유리한 지형과 강력한 포병 화력을 앞둔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의 진격을 저지할 결의를 굳혔다.
프랑스군은 카스텔조를 공격했다. 제6선열연대 2개 대대는 우익으로 이동해 적 포대를 우회했고, 말레르 장군은 제40선열연대 및 제6경보병 3개 대대를 이끌고 고지로 진격했으며, 제22선열연대는 마을을 정면 공격했다. 첫 공격은 격퇴되었으나, 프랑스군은 제28선열연대와 란이 직접 지휘하는 예비대와 함께 재돌입해 카스텔조에 진입했다. 포 강을 건너는 데 성공한 제12엽기병 200명은 수차롞 돌격을 감행했지만, 마을은 그때마다 주인이 바뀌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럼에도 프랑스군은 질서 있게 물러설 수 있었는데, 이때 시각은 오후 3시였다.
오후 2시, 프랑스군 좌익의 샹바를라크 사단이 리보(Rivaud) 장군의 지휘 아래 라 스트라델라에서 출발해 강행군을 감행한 끝에 전장에 도착했다. 이 증원의 도착이 전세를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격렬한 압박을 받은 오스트리아군 중앙은 와해되었고, 란의 부대는 제2선으로 물러났다. 우익에서 리보는 제43선열연대를 이끌고 고지를 점령한 뒤 로르도네(도르도네) 성을 포위·함락시켰다. 좌익의 에르뱅(Herbin) 역시 제24경보병으로 오스트리아군 측면을 압도했고, 중앙의 제96선열연대는 카스텔조를 최종 탈환했다.
오트의 강력한 포병대는 집정위 호위대의 포병과 격렬한 포격전을 벌였다. 오트의 병력을 몬테벨로 방향으로 밀어내는 데만 5시간의 전투가 필요했으며, 오스트리아군은 몬테벨로에서 치열한 방어전을 펼치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윽고 전장에 도착한 보나파르트는 빅토르에게 6개 대대로 중앙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빅토르의 부대는 화망으로 방어되던 다리를 백병전으로 돌파했다. 동시에 주네(Geney) 장군이 5개 대대와 엽기병 1개 연대로 오트의 좌익을 무너뜨렸고, 도르도네 성에서 몬테벨로로 전진한 리보가 포위망을 완성했다. 결국 오트의 부대는 포게라 서쪽 10km 지점의 카스텔누오바로 급히 후퇴하고 말았다.
전투의 결과와 영향
"무척 뜨거웠소, 정말 뜨거웠소." 전투가 끝난 뒤 란이 남긴 이 한마디는 거의 11시간에 달하는 치열한 공방의 강도를 잘 보여준다. 오트 장군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놀라운 투지를 발휘했으며, 수적 우위를 앞세워 거의 승리를 쥐 뻔하기도 했다.
코녜(Coignet) 대위는 이 승리의 규모를 생생히 증언했다.
"포로가 우르르 잡혔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쩔 줄 몰랐고, 아무도 호송하려 하지 않았는데 포로들이 스스로 걸어갔지요. 완전한 궤주였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발포하지 않았습니다. 토끼처럼 도망쳤습니다. 특히 기병대는 자기들 보병마저 겁먹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집정관께서 전승을 확인하러 오셨을 때, 란 장군은 온통 피투성이여서 무섭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는 화선 한가운데 어디에나 있었고, 마지막 돌격을 직접 지휘한 사람도 그였습니다. 기병 연대 두 개만 더 있었다면 적 보병 전체를 생포했을 것입니다."
젊은 프랑스군은 노련한 오스트리아군에 결코 밀리지 않았다. 오스트리아군은 승리의 문턱까지 갔지만, 결국 약 3,000명의 손실에 더해 5,000명의 포로, 6문의 대포, 그리고 여러 개의 군기를 프랑스군 손에 남겨두고 물러났다. 이 승리는 프랑스군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란에게는 1808년 6월 15일 '몬테벨로 공작'이라는 칭호를 안겨주었다.
패퇴한 오트는 잔존 병력을 수습해 알렉산드리아 성벽 아래에서 멜라스와 합류했고, 양군은 곧이어 마렝고 전투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벌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