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젊은 국왕 프랑수아 1세는 1515년 9월 13일과 14일 마리냐노에서 벌어진 신성 동맹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오랫동안 영광에 싸여 있었습니다. 신성 동맹은 신성 로마 제국, 밀라노 공국, 스위스 용병 연합군, 그리고 교황으로 구성된 연합 세력이었습니다. 이 승리로 프랑스는 밀라노 공국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와 스위스 칸톤 간의 '프리부르 영구 평화 조약'(1516년)과 함께 볼로냐 협약이 탄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볼로냐 협약의 체결
볼로냐 협약은 1516년 8월 18일에 공식적으로 비준되었습니다.
주요 인물
프랑수아 1세 (프랑스 국왕)
교황 레오 10세
협약의 경위
1515년 12월 11일부터 15일까지 다섯 날 동안, 교황 레오 10세와 프랑수아 1세는 볼로냐에서 회담을 가졌습니다. 교황은 8일에 먼저 도시에 도착했고, 국왕은 11일에 교황에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의전을 갖추어 합류했습니다. 행사는 장대하게 치러졌으며, 회담은 수상 앙투안 뒤프라(Antoine Duprat)가 라틴어로 낭독한 연설로 막을 열었습니다. 이 연설에는 교황과 국왕에 대한 찬사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양측의 요구 사항은 뒤프라가 주도한 협상 끝에 볼로냐 협약으로 정착되었고, 최종적으로 1516년 8월 18일 비준을 거쳤습니다.
이 문서는 특히 1438년 샤를 7세가 서명한 '부르주 국본조항(Pragmatic Sanction of Bourges)'을 재정비한 것이었습니다. 부르주 국본조항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회의체인 국가 종교회의가 교황권보다 우선한다는 원칙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제 수도원장·주교·대주교는 더 이상 선출되지 않고 프랑스 국왕이 직접 임명하게 됩니다. 다만 교황청은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유지했습니다. 임명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은 이전처럼 프랑스 의회가 아니라 로마 교황청에 항소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교황 레오 10세의 권위를 높인 결과로 그에게 큰 만족을 안겨주었습니다. 아울러 교황은 성직자가 주교와 같은 요직을 넘겨줄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헌납금(annates)을 다시 징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편 프랑스 국왕은 이 협약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폰 합스부르크를 제치고 '교회의 장남'이라는 명예로운 지위를 차지합니다.
영향과 결과
교황의 정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갈리카니즘(Gallicanism) 노선에 선 프랑스 의회, 학자들, 그리고 일부 성직자들은 협약 비준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국왕의 강력한 압박 속에 의회는 결국 굴복하여 1518년 3월 22일에 서명하고 말았습니다. 내정 측면에서 보면, 국왕이 상급 성직자를 임명하게 되면서 여전히 선출 방식을 따르고 미미한 급료만 받던 하급 성직자들과의 대립이 불거졌습니다. 이제 군주는 성품을 받은 귀족들, 즉 상급 성직자로 규정되는 교회 귀족들을 정당하게 후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급 성직자들은 깊은 소외감을 느꼈지만, 볼로냐 협약 자체는 1790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도전받지 않았습니다.
한 왕국의 교회에 대해 이토록 강력한 권한을 행사한 군주는 역사상 드물었습니다. 게다가 국가는 성직자들에게 십일조(décime)라는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볼로냐 협약은 프랑스를 로마 교황청의 특별한 대화 상대로 자리매김시켰고, 이후 교황청이 다른 국가들과 손잡고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꾸리는 일을 사실상 봉쇄했습니다. 이 협약을 발판 삼아 프랑수아 1세의 왕국은 국제 정치 무대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