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808년 소모시에라 고개 전투, 나폴레옹을 구한 폴란드 기병들의 돌격

지형적 장벽: 시에라 데 과다라마 산맥

이베리아 반도의 북과 남을 가르듯, 해발 2,500미터에 이르는 험준한 산맥들, 이른바 '시에라'가 거의 평행하게 줄지어 솟아 있다. 이 산맥들은 구카스티야와 신카스티야를 나누는 자연의 국경이다. 그 기슭에는 좁은 골짜기가 파인 드넓고 척박한 고원 지대가 펼쳐져 있다. 아란다에서 마드리드로 향하려면 반드시 시에라 데 과다라마 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이 거대한 산맥에는 단 하나의 통로만이 존재한다. 바로 해발 1,438미터의 소모시에라 고개다. 엄밀히 말해 고개라기보다는 협로에 가깝다. 길이 약 2킬로미터, 폭이 어떤 구간에서는 불과 30미터에 불과한, 구불구불 꺾인 길이 바위와 잔석 사이로 이어진다.

마드리드의 방어 준비

나폴레옹이 스페인에 도착한 뒤로 프랑스군의 정보 수집은 한층 정교해졌다. 황제는 부르고스 북방에서 스페인군이 참패한 이후, 마드리드에 소집된 정부 후타가 병력 28,000명과 대포 28문을 갖춘 군단을 편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휘관으로 임명된 베니토 산 후안은 광신적일 정도로 열정적인 카스티야 사람이었다. 마드리드 시민들은 모두 그가 과다라마 산맥에서 프랑스군의 진격을 막아낼 것이라 확신했다.

11월 29일, 빅토르 군단이 시에라 기슭의 보카기야스 마을에 도착했다. 나폴레옹은 그곳에 야영하며 작전 지시를 내렸다. 뤼팽 사단이 세 개 종대로 나뉘어 전진한다. 중앙 종대는 고개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진행하고, 좌우 두 종대는 바위를 오르며 측면을 우회해 저항을 분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계획의 차질

11월 30일 새벽, 작전이 개시되었다. 나폴레옹은 선두에 선 뤼팽 사단과 함께 행군했고, 안개는 접근을 은폐해 주었다. 그러나 곧 좌우로 발진한 종대 지휘관들로부터 비관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가파른 절벽길에서의 진격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느리고 힘겨웠다는 것이다.

"적의 대포와 소총 사거리 안에 우리 보병이 들어서는 순간 학살이 벌어질 것이고, 그때 중앙 종대는 아무런 엄호 없이 홀로 전진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실패는 명약관화했다.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황제의 결단: 기병 돌격

나폴레옹은 몇 분 만에 결심을 내렸다.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번개 같은 기습, 즉 기병 돌격뿐이었다. 근위 엽기병 연대장 피레 대령이 정찰에 나섰다. 고개까지 2.5킬로미터, 그 사이 직각으로 꺾이는 급커브가 세 곳. 각 커브마다 수백 명의 스페인 병사와 도로를 종으로 지키는 대포 4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고개 자체에는 대포 16문의 포대가 버티고 있었다. 능선 위에는 수천 명의 스페인 병사가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피레는 통과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나폴레옹의 답은 짧았다. "그런 말은 모른다!"

폴란드 경기병, 역사의 무대에 서다

수십만 부가 인쇄되어 전유럽에 퍼진 에피날 삽화 속 전설이 이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황제 곁에는 근위 폴란드 경기병들이 있었다. 왕청색 제복에 진홍색 흉갑과 바지, 고향의 전통 모자인 샵스카를 쓴 그들은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복장을 단정하게 가꾸었고, 보기 좋게 빛났다. 인원은 250명. 그러나 그들은 아직 포화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신참들이었다.

그때 황제 막료에서 한 기병이 눈에 띄었다. 키 크고 잘생긴 장교, 몽브룡 장군. 당시 지휘관 자리 없이 '수행 무관'으로 있다는 사실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그는 모자를 눌러 쓰며 외쳤다. "폐하, 이 젊은이들을 이끌게 허락해 주십시오!" 나폴레옹이 고개를 끄덕이자, 또 한 명의 장교가 돌격을 청했다. 황제의 부관 장교이자 훗날 장군이 되는 필립 드 세귀였다.

전진! 처음에는 조보로, 이윽고 승보로. 세귀는 "우리는 배를 땅에 붙이고 돌격했다"고 기록했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과장이 섞인 문구다. 대육군 기병의 승보가 경마장의 그것은 아니라는 점은 이제 모든 사가가 알고 있다. 그러나 꽤 가파른 이 비탈에서 폴란드 중대가 실제로 승보로 달렸다는 것은 사실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커브: 피바람

2분 만에 첫 번째 커브, 스페인 포 4문이 나타났다. 일제 사격이 선두 소대를 쓸어버렸고, 폴란드 중대장 코지에툴스키가 전사했다. 전진! 중대는 두 번째 커브를 향해 달렸다. 똑같은 일제 사격, 똑같은 결과. 50기의 기병이 쓰러졌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압도적인 함성과 함께 돌진은 멈출 줄을 몰랐다.

목격자들의 증언은 세부에서 서로 다르다. 폴란드 기병들이 돌격하며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지, 아니면 다른 기록들이 말하듯 전투 함성을 질렀는지. 한 손에는 사브르, 다른 손에는 권총, 그리고 이 사이에 고삐를 물고 있었다는 묘사도 있는데, 그런 자세로 만세를 외치기란 어려운 일이다. 매번 사격마다 몇 기가 쓰러졌는지 세어 본 사람도 없다. 소모시에라 전투를 목격한 이들의 증언은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 하나는, 백여 기의 기병이 몽브룡과 니에골레프스키 중위의 인솔로 고개에 도달할 수 있었으니, 그 돌진은 실로 '저항 불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개의 포대가 발포했다. 세귀와 니에골레프스키가 쓰러졌고, 그들과 함께 또 60명의 폴란드 기병이 말에서 떨어졌다. 생존자는 부상자를 포함해 겨우 40명. 스페인군에게 재장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됐다. 아직 살아 있고 아직 말 위에 있던 몽브룡은 사브르를 치켜들었다. 전진!

집단 공포의 순간

그때 드물지만 역사상 여러 번 목격된 바 있는 현상이 일어났다. 집단적 공포였다. 고개를 방어하던 스페인 병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앞선 두 차례의 포격에도, 자신들의 일제 사격에도 아무것도 적 기병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이 프랑스인들은 상처 입지 않는 악마들이다. 도망쳐라!

베니토 산 후안은 도주하는 병사들의 격류 한가운데 뛰어들어 욕설을 퍼붓고 사브르 자루로 때려가며 저지하려 했다. 그러나 어떤 힘도 공황의 격류를 막을 수 없다. 그리고 그를 쓰러뜨린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병사들의 소총탄이었다. 광신도 산 후안의 시체 주위에서 경기병들의 사브르가 스페인 병사들의 머리를 날렸다. 만세, 황제 폐하 만세!

황제의 찬사

말을 달려 온 것은 틀림없는 나폴레옹이었다. 막료를 대동하고, 뤼팽 사단이 그 뒤를 전력으로 따랐다. 나폴레옹은 말에서 내려 시체들에 둘러싸여 누워 있는 니에골레프스키 중위에게 다가갔다. 살아 있었지만 온몸이 피에 절어 있었다. 황제는 자신의 십자 훈장을 떼어 부상자의 가슴에 꽂아 주었다. 이미 전설이 된 제스처였다. 세귀 역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부상만 다섯 곳.

"용사들아, 너희가 여기서 빼앗은 군기를 파리까지 운반하게 될 것이다."

그날 저녁 황제는 시에라 너머 부이트라고에서 잠들었다. 다음 날 그는 생존한 경기병들을 소집하라고 명령했다. 40명 중 3분의 1 가까이가 부상자였다. 머리에 붉은 붕대를 감은 자들, 팔을 붕대로 매단 자들, 몇몇은 근위 엽기병의 어깨에 기대어 걸어왔다. 나폴레옹은 말 위에서 모자를 벗었다.

"너희는 모두 내 근위대에 합당한 자들이다. 나는 너희를 내 가장 용감한 기병으로 인정한다."

폴란드 기병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드리드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