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다호스 공성전은 1812년 3월 16일부터 4월 6일까지 스페인 독립 전쟁(반도 전쟁)의 일환으로 벌어진 전투다. 웰링턴 공작이 지휘하는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이 아르망 필리퐁(Armand Philippon)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바다호스 수비대와 맞섰다. 이 공성전은 나폴레옹 전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유혈이 낭자한 전투 중 하나로 꼽히며, 영국 입장에서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 승리로 기록된다. 공격 최종 단계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가 불과 몇 시간 만에 약 3,000명의 연합군 병사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배경
알메이다와 시우다드 로드리고를 차례로 함락시킨 영국-포르투갈 연합군은 과디아나 강 좌안에 자리한 요새 도시 바다호스로 진격했다. 연합군의 주요 작전 기지인 리스본과의 보급·통신선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양측의 상황
바다호스는 도시 군정관인 프랑스 장군 아르망 필리퐁의 지휘 아래 약 5,000명의 수비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알메이다나 시우다드 로드리고보다 훨씬 강력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요새화 거점과 방벽으로 보강된 견고한 성벽을 지닌 바다호스는 이미 두 차례의 공성 시도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례가 있었다. 성벽 추가 보강, 남동쪽 리바야스 강의 물을 가두는 인공 호수 조성, 남서쪽 사면 급경사지(글라시)에 설치한 폭발성 지뢰 등으로 세 번째 공성에도 철저히 대비한 상태였다.
다만 요새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인공 호수 건너 남동쪽에 솟아 있는 산 미겔 언덕이었다. 연합군은 바로 이곳에 포대를 먼저 설치했다. 이를 간파한 프랑스군은 두 개의 외곽 요새를 건설했다. 산 미겔 언덕 방향 동쪽의 피쿠리나 요새와 남쪽의 대형 요새 파르달레라스가 그것이다.
공성 준비
25,000명 규모의 연합군은 프랑스 수비대보다 5배나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도시 포위가 완료된 후 공성전은 참호와 '평행호', 공성 포병을 보호할 토사 공사를 파내는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집중적이고 긴 폭우로 인해 토목 작업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 연합군이 진지를 구축하는 동안 프랑스군은 성벽으로 통하는 접근 참호를 파괴하기 위해 여러 차례 기습을 감행했으나, 영국 저격수와 선열 보병대에 의해 매번 격퇴당했다. 18파운드급과 24파운드급 중박격포가 설치되자 연합군은 도시 방어 시설에 대한 집중 포격을 개시했다.
외곽 방벽 피쿠리나는 토머스 픽턴(Thomas Picton) 장군의 제3사단 붉은 코트(영국 보병)에 의해 함락되었고, 이를 통해 공성 진지 구축이 계속되고 참호가 높은 석벽 앞까지 연장될 수 있었다. 부활절 월요일인 3월 30일부터 4월 4일 토요일까지, 피쿠리나 폐허로 신속히 옮겨진 새로운 영국 포대들은 성벽의 석조물을 끊임없이 두들겼다. 4월 5일, 성벽 남동쪽에 두 개의 돌파구가 열렸다. 하나는 트리니다드 방벽, 다른 하나는 산타 마리아 방벽이었고, 연합군 병사들은 바다호스 강습을 준비했다. 이에 맞서 프랑스 수비대는 성벽에 열린 두 돌파구에 지뢰를 매설한 뒤 포위군과의 최후 대결에 나섰다.
그러나 공격 명령은 24시간 연기되었다. 포위당한 측이 봉쇄하거나 지뢰를 매설할 시간조차 없는 세 번째 돌파구를 열기 위해서였다. 4월 6일 하루 종일 두 방벽 사이의 커튼월(연결 성벽)을 집중 포격한 결과, 약해진 구간이 오후 초반 무너져 내리며 세 번째 돌파구가 완성되었다. 박격포는 오후 내내 세 개의 대형 돌파구를 계속 두들겨 프랑스군이 메울 틈을 주지 않았다. 한편 술트 원수의 프랑스 구원군이 곧 도착한다는 소문이 연합군 진영에 퍼지자, 웰링턴은 긴급히 1812년 4월 6일 월요일 밤 10시 강습 명령을 하달했다.
강습
경보병 사단은 산타 마리아 방벽의 돌파구로, 제4사단은 트리니다드 방벽의 돌파구로 진입했다. 병사들은 강습 사다리를 들고, 긴 자루 도끼와 낙하 충격을 완화할 짚자루 등 각종 공성 도구를 지녔다. 최전선에는 '포론 호프(Forlorn Hope)'라 불리는 자원자들이 섰고, 그 뒤를 제4사단과 크라우퍼드의 경보병 사단이 따랐다.
남동쪽 돌파구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지원하는 양동 작전으로, 북쪽 성(카스티요)의 바위 절벽 등반은 픽턴 장군의 제3사단에, 북서쪽 산 비센테 방벽 공격은 제임스 리스(James Leith) 장군의 제5사단에 맡겨졌다. 포론 호프 병사들이 공격을 개시하려던 바로 그 순간, 프랑스 초병이 연합군을 발견하고 경보를 울렸다. 순식간에 성벽 위는 프랑스 병사들로 가득 찼고, 돌파구 기슭에 몰려든 부대들에게 치명적인 머스킷 탄막이 쏟아졌다. 영국군과 포르투갈군은 대거 돌진해 돌파구를 오르며 머스킷 사격, 수류탄, 돌, 엉성한 도화선이 달린 화약통, 심지어 적의 위치를 드러내는 불타는 짚더미까지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 격렬한 탄막은 영국군 대열을 잔혹하게 갈아놓았고, 돌파구는 곧 전사자와 부상자의 시체로 채워져 강습 부대의 진입조차 어려워졌다. 그럼에도 붉은 코트들은 대담하게 대규모 전진을 계속했지만 머스킷탄과 산탄 앞에 줄줄이 쓰러졌다. 단 두 시간 만에 주 돌파구에서만 약 2,000명이 전사하거나 중상을 입었고, 제3사단의 많은 병사 역시 요새 북측면 성에서의 양동 공격에서 목숨을 잃었다. 픽턴 장군 본인도 사다리를 타고 성벽 꼭대기에 오르다 부상당했다. 산타 마리아와 트리니다드 방벽의 돌파구를 공격하는 병사들은 체계적으로 격퇴되었고, 학살이 너무 참혹해 웰링턴은 부대 철수까지 고민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모든 예상을 깨고, 제3사단 병사들이 가장 먼저 성벽 꼭대기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고, 제5사단 병사들도 그날 밤 늦게 산 비센테 방벽을 점령했다. 두 사단의 병사들은 도시 내부로 진격해 합류한 뒤, 돌파구를 방어하던 프랑스군의 후방을 압박함으로써 마침내 주공 부대가 돌파구 위에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게 했다. 교두보를 확보한 순간부터 연합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필리퐁 장군과 수비대 생존자들은 바다호스를 버리고 과디아나 강 우안(건너편) 북쪽의 인근 요새 산 크리스토발로 후퇴했으며, 1812년 4월 7일 아침 그곳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여파
요새 점령이 완료되자마자 도시 약탈이 완전한 무질서 속에서 시작되었다. 붉은 코트들이 술을 마시며 날뛰면서 부대 통제가 정상화되기까지 사흘이 걸렸다. 바다호스 약탈은 무분별한 야만 행위로 기록되며, 많은 역사학자들이 영국군이 저지른 특히 끔찍한 만행의 사례로 꼽아왔다. 병사들은 가옥에 난입해 재산을 훼손하거나 약탈했고, 노약자를 포함한 모든 계층의 스페인 시민들이 살해되거나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이를 말리려던 일부 영국 장교들마저 자기 부하들의 총에 쓰러지기도 했다.
당시에는 요새 도시를 강습으로 함락시킨 승리 부대에게 24시간의 약탈을 허용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웰링턴의 엄격한 지침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위였다. 그는 동맹국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병사들이 소비하는 모든 물품의 대금을 지불할 것을 요구했고, 군수 담당관의 무상 징발을 엄금했다. 문제는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깔린 불신이었다. 스페인 관료들의 의심스러운 행보(탈라베라 전투와 바로사 전투 이후의 결과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는 영국군의 반감을 샀던 반면, 포르투갈과 영국은 완벽한 조화 속에서 함께 싸우고 있었다. 또한 강습이 너무나 처참했던 탓에 장교들은 초기 몇 시간 동안 병사들의 폭주를 억제할 엄두를 내지 못했고, 강습 과정에서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해 병사들은 사실상 감독 없는 상태로 도시에 진입했다. 아울러 1808년 전쟁 발발 이래 프랑스군 역시 수많은 도시 약탈을 자행하며, 그때까지 분쟁에 중립적이던 주민들마저 공격해 게릴라전이 확산되는 토양을 스스로 만들어왔다.
4월 7일 새벽, 성벽 주변에 펼쳐진 학살의 참상이 드러났다. 시신은 산처럼 쌓였고 피는 참호에 시내를 이루며 흘렀다. 파괴와 학살의 규모를 직접 확인한 웰링턴은 몹시 울었고, 이토록 적은 자원과 병력만을 배정한 영국 의회를 격렬히 저주했다고 전해진다. 강습과 예비 교전으로 연합군의 손실은 약 4,800명에 달했다. 정예 부대인 경보병 사단은 병력의 40%를 잃는 중대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공성전의 종결과 함께 웰링턴은 스페인-포르투갈 국경을 완전히 확보했고, 이제 살라망카로 진격해 마르몽 원수와의 결전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