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자파 공성전(1799):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과 잔혹한 승리

자파 공성전(1799): 나폴레옹의 시리아 원정과 잔혹한 승리
1799년 3월 3일부터 7일까지 이집트 원정 과정에서 벌어진 자파 공성전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제자르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격파했습니다.

배경

자파는 시리아 지역의 주요 무역 중심지 중 하나로, 항구가 함대에 필수적인 피항지를 제공할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이집트·시리아 원정의 성패는 자파 함락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나폴레옹은 북진을 위해 반드시 이 도시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엘아리시 공방전 이후 보나파르트의 부대는 시리아 깊숙이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행군 도중 그들은 현지 가이드들의 배신, 약탈꾼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은 물론 극심한 허기와 갈증까지 견뎌야 했습니다.

공성전의 경과

3월 3일(프랑스 공화력 7년 바ント즈월 13일), 클레베르의 선봉 부대가 자파 성벽 앞에 도착하여 아코(생장다크르)로 향하는 길목 위, 도시에서 약 두 리그(약 8km) 떨어진 지점에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동시에 보와 란이 지휘하는 사단은 도시 주변에 포위선을 펼쳤습니다.

자파는 탑으로 보강된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다행히도 해자는 없었습니다. 제자르 파샤는 포병 1,200명을 포함한 정예 부대에 도시의 방어를 맡겼습니다.

다음 날, 정찰을 기다리던 뮈라는 약 30문의 포에서 쏟아지는 집중 포격을 받았습니다. 3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 사이, 프랑스군은 남쪽 성벽의 사각형 탑을 겨냥해 돌파 포대 하나와 역포대 두 개를 설치했습니다. 3월 6일(바ント즈월 16일)에는 수비대의 몇 차례 출격이 강력히 격퇴되는 가운데 공사 마무리에 하루를 보냈습니다.

3월 7일 이른 아침, 보나파르트는 도시의 항복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나 사절은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오전 7시 프랑스 포병이 포격을 개시했고, 오후 1시경 포위군의 압박으로 성벽의 탑 하나가 무너졌습니다. 오후 3시경 보나파르트는 직접 참호를 점검한 뒤 돌파구가 통행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총돌격을 명령했습니다. 수비대는 끝까지 용감하게 저항하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북쪽에서 양동 작전을 수행하던 보 사단은 우연히 지하 통로를 발견합니다. 사단 전체가 이 통로를 통해 이동해 도시 중심가에 모습을 드러냈고, 저항 기세가 꺾이는 것을 간파한 란 사단은 다시 공세를 강화해 사각형 탑을 공격, 탑은 곧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삼면 포화에 갇힌 오스만군은 필사적으로 백병전까지 벌였지만, 흩어진 수비대의 잔여 병력은 집집마다 추격당하며 궤멸했습니다.

결과와 여파

최후통첩을 전달하던 사절이 참수당한 사건과 수비대의 완강한 저항은 프랑스 병사들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남성들은 총검으로 처형되고 수많은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일부 병사들은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습니다. 질서 회복과 학살 중단을 위해 파견된 부관 보아르네와 크루아지에는 상당수 오스만 병력이 한 건물 안으로 철수한 뒤, 생명을 보장해주는 조건에서만 항복하겠다고 밝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두 장교는 이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약 3,000명에 달하는 포로를 마주한 보나파르트는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이렇게 많은 포로를 내가 어쩌라고? 먹일 식량도, 수용할 건물도 없는데. 도대체 저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저질러 놓은 거야?"

이틀 이틀 밤 동안 학살, 약탈, 강간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3월 10일, 항복 당시 목숨을 건져주겠던 약속에도 불구하고 3,000명의 포로는 모두 처형되었습니다. 훗날 나폴레옹은 이를 정당화하며, 이토록 많은 포로를 감시하려면 너무 많은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고, 석방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즉시 제자르 파샤의 군대에 합류할 것이므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3월 19일, 프랑스군은 드디어 아코 성벽 앞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간의 공방전 끝에도 함락에 실패하고 결국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프랑스군 진영의 열악한 위생 상태로 인해 발생한 페스트는 자파와 아코의 주민들과 함께 프랑스군마저 휩쓸었습니다.

북부에서 튀르크군에 밀린 나폴레옹은 결국 팔레스타인을 포기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튀르크의 동맹국인 영국은 윌리엄 시드니 스미스의 지휘 아래 자파의 성벽을 재건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