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기욤-마리-앤 브륀 – 공화주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프랑스 제국 원수

기욤-마리-앤 브륀 – 공화주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프랑스 제국 원수

기욤-마리-앤 브륀(Guillaume-Marie-Anne Brune, 1763년 5월 13일 브리브라가야르드 ~ 1815년 8월 2일 아비뇽)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를 관통한 장군이자 제국 원수였다.

혁명 속에서 시작된 군 경력

프랑스 혁명 초기 파리에서 인쇄업자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당통(Danton)과 친분을 쌓았던 브륀은 1791년 10월 센에우아즈 자원병 제21대대의 부관으로 군에 입대했다. 정치적 인맥을 등에 업은 그의 군 경력은 눈부시게 빠르게 상승했다. 북부군에서 뒤무리에(Dumouriez) 장군의 참모로 근무한 뒤에는 연방주의자 반란 진압을 담당한 세페르(Sepher)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파시쉬르외르(Pacy-sur-Eure) 전투에서 방팽(Wimpffen)을 격파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다시 북부군으로 돌아온 그는 1793년 8월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옹스코트(Hondschoote) 전투에 참전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에는 보나파르트, 바라스(Barras)와 함께 왕당파 반란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이탈리아 원정과 베르겐의 승리

브륀은 보나파르트를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아르콜레(Arcole)와 리볼리(Rivoli) 전투에서 활약했다. 1797년 11월 사단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탈리아군과 헬베티아군을 차례로 지휘한 뒤, 바타비아(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1799년 9월 19일 베르겐(Bergen) 전투에서 헬더(Helder)에 상륙한 영러연합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집정정부 시절의 활약

제1집정 보나파르트의 핵심 협력자 중 한 명이었던 브륀은 1799년 12월 25일 국무회의 의원에 임명되었다. 보나파르트는 서부 지방의 반란을 종식시키라는 임무를 그에게 맡겼고, 브륀은 방데(Vendée)와 슈앙(Chouan) 지도자들이 무기를 내려놓도록 협상하는 데 성공했다. 1800년 8월에는 마세나(Masséna)를 대신해 이탈리아군 사령관이 되었으며, 베로나와 비첸차를 점령하고 트레비소(Treviso)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공화주의 신념을 끝내 버리지 않은 브륀은 제1집정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1802년부터 1804년까지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로 좌천되었다.

제국 원수 임명과 실각

1804년 5월 19일 제국 원수로 임명된 브륀은 불로뉴 캠프 군대 총사령관, 1806년 12월부터는 한자 도시들의 총독, 그리고 대육군 감시군단 사령관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의 공화주의 성향은 황제에게 계속 불안감을 주었다. 특히 스웨덴과의 협정에서 '황제 폐하의 군대'가 아닌 '프랑스 군대'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면서 실각했고, 1814년까지 어떠한 직책도 맡지 못한 채 물러나 있어야 했다.

백일천하와 비극적 최후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브륀이 1814년 부르봉 왕정복고에 호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공화국에 있었고, 백일천하 동안 나폴레옹이 제안한 마르세유 군사구 사령관직을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브륀은 1815년 7월 말까지 툴롱에 삼색기를 계속 게양하게 했다. 이 도발적인 행동은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비뇽을 방문하던 중 왕당파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원수 브륀의 이름은 오늘날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에 새겨져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