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스티글리오네 공작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제로(Charles Pierre François Augereau)
샤를 피에르 프랑수아 오제로(1757년 파리 출생 ~ 1816년 6월 12일 라우세앙브리 별세)는 프랑스 제국의 원수이자 카스티글리오네 공작으로,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군인 중 한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오제로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하인이었고, 어머니는 생마르스보 외곽 지역에서 과일 장수를 하던 무학 여성이었습니다.
방랑과 망명의 세월
그는 열일곱 살에 왕립군에 입대하여 부르고뉴 기병연대, 이후 카라비니에 연대에서 복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모욕한 장교에게 검을 뽑아 든 사건 이후 프랑스를 떠나야 했고, 나폴리로 건너가 1787년까지 펜싱 사범으로 생계를 꾸렸으며 그리스까지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나폴레옹 휘하의 원수들 중 오제로만이 유독 프로이센군 복무 경력을 갖고 있는데, 이 시기 그는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 참전했습니다. 상사로까지 승진했지만 소대 전체를 이끌고 탈영하여 작센 국경까지 도주했습니다. 1788년부터 1791년까지는 나폴리군, 이후에는 포르투갈군에서 복무했으며, 프랑스 혁명의 소식을 접하고 1792년 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혁명의 군인
열렬한 자코뱅파였던 그는 국민방위군에 입대해 하사가 되었고, 이후 대위와 중령으로 차례로 승진했습니다. 브르타뉴 지방의 슈앙 반란 진압에 참여한 뒤 피레네 군에 배속되어 1793년 12월 23일 사단장으로 승진했습니다. 1795년 이탈리아 군으로 전속된 그의 사단은 로아노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탈리아 원정
1796년 보나파르트 휘하에서 오제로는 몬테노테 전투와 밀레시모 전투, 그리고 4월 14일 코세리아 성 함락전에서 활약했습니다.
1796년 5월 10일 로디 다리 전투에서는 그의 부대의 우회 기동이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 특히 같은 해 8월 5일 카스티글리오네 전투에서는 전세를 역전시키는 가장 빛나는 공을 세웠습니다. 또한 11월 15일 아르콜 전투에서도 병사들의 선두에서 다리로 돌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나파르트는 오제로를 깊이 신뢰하여 적에게서 빼앗은 군기를 총재정부에 헌상하는 영예로운 임무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전선을 떠난 오제로는 파리에서 벌어지는 온갖 정치적 음모에 깊숙이 개입했으며, 왕당파로 의심되는 의원들을 축출한 1797년 9월 4일(프락티도르 18일)의 쿠데타에 가담했습니다. 그 공으로 앙브르에무즈 군, 이어서 라인 군의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오트가론 주 대표로 오백인 평의회 의원에 선출되어 좌파 의석에 앉았습니다.
자코뱅파답게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는 처음에 적대적이었으나 결국 보나파르트에게 귀순했고, 바타비아(네덜란드) 주둔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다음 해 빅토르에게 자리를 넘긴 그는 한동안 공석 신세로 지내며 집정정부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1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공화주의적 열정도 식었고, 1804년 5월 19일 제국 원수에 임명되어 레지옹 도뇌르 대장교, 카스티글리오네 공작 작위와 스페인 카를로스 3세 훈장 대십자장을 받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듬해 대육군 제7군단장으로 임명되어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선에 배치되었으나 아우스터리츠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1806년 독일 전역에서는 10월 14일 예나 전투에서 작센군을 격파하고 프로이센군을 구원하러 온 뷔헬 군단을 궤멸시켰으며, 골리민 전투에서도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1807년 초 병을 얻어 1807년 2월 8일 아일라우 전투 때는 말에 묶어 둘 정도로 위독한 상태로 참전해야 했습니다. 러시아군 중앙을 공격하려던 그의 군단은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었고, 프랑스 병사들은 적의 포격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팔에 부상을 입은 오제로는 프랑스로 귀환했으며, 1808년 3월 19일 카스티글리오네 공작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후 스페인 전선에 투입되어 1809년 카탈루냐 원정에서 잔혹한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카탈루냐 군 사령관으로 거둔 초기 승리는 곧 연이은 패배로 이어졌습니다.
황제는 그를 영지로 돌려보냈지만 1812년 러시아 원정을 위해 다시 불러들여 독일에 주둔하는 대육군 제11군단(예비군단)을 맡겼습니다. 오제로는 1813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벌어진 라이프치히 전투의 패색 짙은 와중에 있었으며, 그 완강한 방어 덕분에 나폴레옹의 신임을 되찾았습니다.
배반과 몰락
1814년 프랑스 방어전에서 오제로는 리옹에 주둔한 군단을 지휘했습니다. 그의 임무는 보헤미아군의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으나 그는 전투를 회피했고, 이러한 행보는 주변에서 배신으로 비쳐졌습니다.
1814년 4월 16일 그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부대에게 부르봉 왕조의 흰색 코카드를 달라고 명령하고 나폴레옹을 폭군이라 규탄했습니다. 루이 18세는 그에게 프랑스 귀족원 의원직과 성 루이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백일천하로 나폴레옹이 귀환하자 오제로는 3월 22일 황제를 찬양하는 화려한 포고문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원수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지워 버리고 그를 '프랑스의 배신자'라 불렀으며, 그에게 어떠한 직책도 주지 않았습니다.
다시 왕좌에 오른 루이 18세 역시 그를 해임했습니다. 오제로는 라우세앙브리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물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후사 없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오제로 가문의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