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피에르 자크 에티엔 캉브롱 자작 – 워털루의 최후의 근위병

피에르 자크 에티엔 캉브롱(Pierre Jacques Étienne Cambronne)은 1770년 12월 26일 낭트(Nantes)에서 태어나 1842년 1월 29일 고향에서 눈을 감은 프랑스의 장군입니다. 나폴레옹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친 '충신 중의 충신'으로 불렸으며, 워털루 전투에서 남긴 한마디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피에르 자크 에티엔 캉브롱 자작 – 워털루의 최후의 근위병
캉브롱의 초상

자원입대부터 방데 진압까지

1791년 9월 로아르앵페리외르(Loire-Inférieure) 제1대대에 자원입대한 캉브롱은 처음에 아르덴(Ardennes)과 북부 방면군에서 복무했으며, 이후 서부로 파견되어 방데(Vendée) 반란 진압 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1793년 9월 중위로, 이듬해에는 대위로 승진했습니다. 1797년에는 아일랜드 원정에 배속되었고, 이어 라인 강과 스위스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특히 취리히 함락 전투에서는 적진 깊숙이 돌진해 대포 두 문을 탈취하는 무공을 세웠습니다.

'프랑스 제2의 척탄병'

1800년 6월 27일 오버하우젠(Oberhausen) 전투에서는 직전에 전사한 투르도베른(Tour d'Auvergne)에 이어 '프랑스 제2의 척탄병'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러나 1805년까지도 그의 계급은 여전히 대위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아우스터리츠와 예나 전투에서 다시 한번 두각을 드러냈고, 사라고사 지휘부에서 에슬링(Essling), 바그람(Wagram)에 이르기까지 주요 전역마다 공을 거듭 세웠습니다. 황제 나폴레옹은 1810년 6월 그를 제국 남작으로 임명했고, 1811년에는 근위 소총병(voltigeurs) 연대의 대령(colonel-major)에 올렸습니다.

1813년 초까지 스페인 전선에 머물렀던 캉브롱은 독일에 재편성된 대육군(Grande Armée)에 합류해 모든 전투에서 두려움 없는 용맹함을 보여주었고, 하나우(Hanau) 전투를 끝으로 준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엘바 섬과 백일천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캉브롱은 '충신 중의 충신'다운 선택을 했습니다. 그는 엘바 섬으로 향하는 폐황을 끝까지 따랐고, 나폴레온이 귀환을 결심했을 때 가장 위험한 선봉 지휘 임무를 맡았습니다. 파리 입성 후 황제는 그를 사단장(Général de division)으로 임명했지만, 캉브롱은 “그야말로 공짜로 얻는 명예처럼 들리는데요”라며 수락을 거절했다고 전해집니다.

워털루, 최후의 방진

피에르 자크 에티엔 캉브롱 자작 – 워털루의 최후의 근위병
워털루의 캉브롱

1815년 6월 16일 리니(Ligny) 전투에서 총검 돌격을 이끈 캉브롱은, 이틀 후 열린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근위대의 최후 방진(le dernier carré)을 구성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근위대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

그날 그가 외쳤다는 유명한 대사 — “라 가르드는 죽어도 항복하지 않는다(La Garde meurt et ne se rend pas !)” 혹은 단 한마디 욕설 “메르드(Merde) !” — 은 정작 본인은 평생 부인했습니다. 훗날 스코틀랜드 출신 여성과 결혼하고 1822년 루이 18세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그로서는, 거칠고 무식한 병사의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의 반복된 항복 권고에 격분한 그가 실제로 그 말을 내뱉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캉브롱의 이름은 오늘날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에 새겨져 그의 공훈을 기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