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장 마리 르네 사바리(Anne-Jean-Marie-René Savary), 로비고 공작(Duc de Rovigo)은 1774년 4월 26일 아르덴(Ardennes) 지방 부지에(Vouziers) 인근 마르크(Marcq)에서 태어나 1833년 6월 2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군인이자 정치가이다.

군 입대와 데자이 장군의 부관
사바리는 오랜 군인이자 스당(Sedan) 성의 소령을 지낸 아버지의 셋째 아들로, 일찍부터 무관의 길을 걸었다. 1790년 군대에 입대한 그는 라인 전선과 이집트 원정에서 페리노(Ferino) 장군과 데자이(Desaix)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커스틴(Custine), 피슈그뤼(Pichegru), 모로(Moreau) 장군 휘하에서 대위 계급으로 라인 전역에 참전했으며, 소령으로 진급한 뒤에는 데자이 장군을 따라 이집트로 건너갔다.
앙기앵 공작 처형과 논란
데자이 장군이 전사하자 사바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관이 되었고, 프랑스로 귀환한 뒤 마렝고(Marengo) 전투에 참전했다. 1802년에는 비밀경찰의 수장으로서 앙기앵 공작(Duc d'Enghien)의 처형을 서둘러 집행했다. 덕분에 군사재판소의 결정 이후 보나파르트에게 사면 청원이 전달될 기회 자체가 차단되었다. 사바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처형으로 이어진 사건들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기술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역할은 매우 부차적인 것으로 묘사했다.
공화력 12년 벤토즈월 30일(1804년 3월 21일), 앙기앵 공작은 방콩(Vincennes) 성으로 압송된 직후였다. 사바리는 파리 수비 연대들이 제공한 분견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는데, 이는 특별한 발령이 아니라 당시 현장에 있던 지휘관들 가운데 유일하게 군사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인물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제국의 장군, 로비고 공작
1805년 사단장으로 진급한 그는 근위대 정예 헌병대의 지휘관을 맡았고, 독일 전역에서는 협상 담당관으로 활약했다. 아우스터리츠(Austerlitz)와 예나(Iéna) 전투에도 사단장으로 참전했다.
1807년에는 란(Lannes)을 대신해 바르샤바에서 제5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아일라우(Eylau) 전투 이후에는 러시아군으로부터 바르샤바를 방어했으며, 1807년 2월 16일 오스트롤렌카(Ostrolenka)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일스베르크(Heilsberg)와 프리트란트(Friedland)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그를 로비고 공작에 임명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프로이센 총독으로 삼았다. 틸지트(Tilsit) 강화 이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전권대사로 파견되었다.
경찰장관 시절과 왕정복고
1808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사바리는 1810년 경찰장관에 임명되어 1814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814년에는 마리루이즈(Marie-Louise) 황후를 블루아(Blois)까지 호위했으며, 제1왕정복고 기간에는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았다. 백일천하였던 1815년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이 되었고, 헌병대 최고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2왕정복고 이후 그는 나폴레옹을 따랐으나, 영국군은 그가 성헬레나 섬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벨러로폰(Bellerophon)호에서 체포된 그는 몰타에 감금되었고, 7월 24일자 추방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몰타에서 탈출해 오스트리아와 터키로 피신했으며, 스미르나(현 이즈mir)에서 상업 투기에 나섰다가 재산의 일부를 잃었다.
귀환과 재기
1817년 사바리는 앙기앵 공작 처형에서 자신이 맡았던 역할 때문에 1816년 12월 25일 선고된 사형 판결에 대해 항변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향했다. 그라츠(Graz)에서는 경찰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1818년 6월에는 스미르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고, 1819년에는 파리에서 자진해 법정에 출두했다. 재판 결과 무죄를 선고받아 작위와 명예는 회복되었지만 관직은 돌려받지 못했고, 결국 1823년 로마로 떠났다.
7월 왕정과 알제리
1830년 사바리는 7월 왕정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주앵빌 공(Prince de Joinville)은 자신의 회고록 『옛 추억(Vieux Souvenirs)』에서 8월 1일 팔레루아얄(Palais-Royal)에서 "제복과 부츠 차림으로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나오는 사바리, 곧 로비고 공작, 앙기앵 공작의 사람"을 보았다고 적었다. 그는 새 왕정에 자신의 복무를 제안하러 갔던 것이다.
1831년 12월 1일 루이필리프(Louis-Philippe) 국왕은 그에게 알제리 최고사령관직을 위임했다. 사바리는 본(Bône, 현 안나바) 점령에 성공했고 식민지화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그의 과격한 통치 방식은 큰 반발을 샀고 결국 1833년 소환되었다. 그는 같은 해 6월 2일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산
사바리는 황제 나폴레옹의 가장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신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름은 파리 개선문(Arc de Triomphe) 동쪽 면에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