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터키는 영국·프랑스와 동맹 조약을 맺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1940년 6월 26일, 터키는 중립 선언이라는 선택을 한다. 히틀러 역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앞서 앙카라에서 "터키의 중립을 존중하겠다"고 공언하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독일과의 우호 협정, 그리고 서방의 계산
이러한 흐름 속에서 1941년 6월 18일, 독일과 터키 사이에 우호 조약이 체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영국과 미국조차 터키의 중립을 묵인했다는 사실이다. 터키군이 전쟁을 치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양국은 차라리 터키를 군사적으로 강화해, 준비를 마친 뒤 연합국 진영에 참전시키는 것이 올바른 정책이라고 여겼다.
순진했던 연합국의 선행
이러한 움직임은 영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미국의 군사 원조는 유명한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따라 1941년 3월 말부터 시작되었다. 영국의 주선으로 원래 영국과 그리스에 보내질 예정이었던 무기들이 터키로 향하게 된 것이다. 처칠은 터키를 연합군의 상륙 작전과 함께 발칸 해방에 기여할 '동맹국'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루스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이 카사블랑카에서 회담을 가진 뒤, 터키가 연합국 편에서参战하여 발칸 반도를 해방하고, 귀중한 크롬 광석이 독일로 흘러드는 통로를 차단하기로 결정한다. 발칸 반도와 터키는 독일 전쟁 산업에 필수적인 이 광석의 핵심 공급원이었다.
아다나 회담, 설득의 실패
1943년 1월 30일과 31일, 처칠은 터키 대통령 이노누와 아다나에서 회담을 갖고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최소한 독일을 공격할 수 있는 기지의 제공이라도 얻어내려 했다. 그러나 터키 측은 '자국군의 미준비'와 '독일이 패배할 경우 유럽 전체가 소련화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끝내 응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논리는 독일 측에서도 똑같이 사용되었다.
감당 못 할 조건, 극단적 요구
연합국의 의구심을 무마하는 동시에 사실상 참전을 회피하기 위해, 터키는 터무니없는 대가를 요구했다. 전차 2,300대, 야포 2,600문, 항공기 1,200대, 항공유 12만 톤, 석탄과 철도 자재, 그리고 막대한 자금까지. 터키는 이것을 결코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요구 목록을 내밀었다.
미국은 합당한 이유로 이 문제 전반을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반면 처칠은 참모총장 앨런 브룩 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1943년 10월,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 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외무장관은 터키가 연합국 편에서参战하도록 공동으로 압력을 가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터키의 참전에서 더 이상 실익을 보지 못해 기지 제공만을 고집했고, 영국 역시 소련 세력 확장을 우려해 이 안을 거부했다.
테헤란과 카이로, 반복된 교착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서 루스벨트, 처칠, 스탈린은 다시 터키 문제를 논의했다. 스탈린은 터키에 강경하게 압력을 가할 것을 주장했지만 역시 아무 성과가 없었다. 터키는 여전히 군사적 취약성을 구실 삼아 어떤 형태의 참전도 거부했다.
같은 해 12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이로에서 이노누를 만나 1944년 2월 중순까지 추축국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요구했다. 터키는 공식적으로는 찬성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조건들을 내걸었다. 처칠은 거부 시 '동맹'의 종식(!)을 의미하며, 영국이 소련의 터키 영토 요구를 지지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터키는 다시 거부했고, 심지어 고위 군사 대표단의 입국을 거부하며 영국을 굴욕시키는 한편, 정작 연합국의 대독 군사 작전 계획은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1944년 2월, 영국 군사 사절단은 터키를 떠났고, 터키에 대한 군수물자 공급도 동시에 중단되었다.
터무니없는 선전포고
그때까지 미국이 터키에 제공한 물자는 당시 화폐 가치로 4,300만 달러에 달했다. 그런데 터키는 1944년 8월, 히틀러 체제가 무너져 가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독일과의 통상·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소련군이 베를린 성문 앞까지 육박하고 서방 연합군이 라인강을 압박하던 1945년 2월 23일에야 겨우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터키가 얻은 것
그렇다면 이 교묘한 외교를 통해 터키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연합국의 지원 덕분에 국채 운용 수익만으로 당시 기준 약 2억 6천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국내 산업 고용은 40% 증가했고, 터키 중앙은행은 상당한 규모의 금 보유고를 축적했다. 게다가 전차만 해도 미국과 영국에서 575대를 공여받았으며, 장갑차는 그보다 더 많이 손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