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아킬 바자인은 누구인가
프랑수아 아킬 바자인(François Achille Bazaine, 1811년 2월 13일 베르사유 출생 ~ 1888년 9월 23일 마드리드 사망)은 프랑스의 원수(Marshal of France)입니다. 그는 알제리, 크림 전쟁, 멕시코 원정 등에서 활약한 군인이었지만, 무엇보다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라인군 총사령관으로서 임무에 실패하여 프랑스의 패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장교 루이나타니엘 로셀(Louis-Nathaniel Rossel)은 바자인을 군사법원에 회부하려 시도하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한 최초의 인물이었습니다.
초기 군 경력
바자인은 1830년 에콜 폴리테크니크 입학 시험에 실패한 뒤 제37선형보병연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이후 1832년부터 1837년까지 외인부대에서 복무하며 알제리와 스페인을 오가며 전투 경험을 쌓았습니다.
1850년 6월 4일 제55연대 대령으로 임명되었고, 1851년 2월 4일에는 제1외인부대연대 지휘관이 되었으며, 다음 달에는 시디벨아베스(Sidi-bel-Abbès) 분견대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전역
1854년 10월 28일 준장으로 진급한 바자인은 동방군에서 외인부대 두 개 연대를 지휘했습니다. 1855년 9월 10일에는 세바스토폴의 군사 사령관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22일 소장으로 승진했습니다.
프랑스로 귀환한 후에는 보병 감찰관을 역임했으며, 이후 부르주(Bourges)에서 제19군관구 사령관을 맡았습니다.
바라게 디예리에(Baraguey d'Hilliers) 휘하 제1군단 예하 제3보병사단을 지휘하던 그는 1859년 6월 8일 메레냐노(Melegnano) 전투와 6월 24일 솔페리노(Solférino) 전투에서 최전선에 근접해 싸웠습니다.
멕시코 원정
바자인은 멕시코 원정 중 푸에블라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습니다. 포레(Forey)를 대신해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Maximilian)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1867년 11월 12일 낭시(Nancy)에서 제3군단 사령관직을 얻었고, 다음 해에는 샬롱(Châlons) 야영지를 지휘한 뒤 레뇨 드 생장당젤리(Regnaud de Saint-Jean d'Angély)를 대신해 황실근위대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보불전쟁과 메스 포위 결정
1870년 8월 12일, 전쟁 한가운데서 바자인은 라인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패배한 라인군은 샬롱쉬르마른으로 후퇴해 예비병력과 합류한 뒤 독일군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러나 8월 16일 마르스라투르(Mars-la-Tour) 전투 이후 적군 여러 부대를 격멸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바자인은 참모진 모두를 놀라게 하면서도 18만 명의 군대를 메스(Metz)로 철수시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군대는 프랑스 본토와 예비병력으로부터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메스에 갇힌 선택에 대한 평가
바자인은 절대 메스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었고,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후퇴하여 18만 명의 병력으로 제국군과 합류해 프로이센군에 맞섰어야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메스는 방어 부대와 군수 창고를 갖춘 요새 도시였지만, 18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기에는 식량이 몇 달 만에 바닥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자인이 성에 갇히지 않았다면 메스는 최소 2~3년은 함락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1870년 메스 포위전의 역사를 잘 아는 메스 거주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저서 『메스의 역사(Histoire de Metz)』입니다.
정치적 음모와 항복
당시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조직된 군대를 이끌던 바자인은 자신이 프랑스의 미래에 중요하다고 확신하고, 특히 황후와 연계해 9월 4일 이후 무너진 제정을 복원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그는 독일과 협상하여 "프랑스를 스스로로부터 구하기 위해", 즉 공화주의 혹은 혁명적 흐름으로부터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군대가 철수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으려 했습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전쟁을 끝까지 수행해야 하며 조국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루이 로셀 대위와 격렬히 대립했습니다(로셀은 1871년 3월 19일 파리 코뮌에 가담한 유일한 장교가 됩니다). 결국 바자인이 추진한 협상은 끌어졌고, 메스 시내의 식량은 바닥나갔습니다.
9월 2일 세당(Sedan)의 함락 이후 바자인은 프랑스 진영의 마지막 희망이었지만, 그는 전투를 계속하지 않기로 하고 10월 27일 항복했습니다. 이 항복은 바자인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점점 더 멀어지는 정부를 방어할 동기를 잃었다는 점으로 설명되곤 합니다.
항복 소식은 포위된 파리 주변의 독일군 포위망을 뚫지 못한 트로슈(Trochu) 장군의 상황과 맞물려 프랑스 전체를 침통에 빠뜨렸습니다. 해방군을 조직하기 위해 투르(Tours)로 갔던 레옹 강베타(Léon Gambetta)는 자신의 시도가 이제 무의미해졌음을 깨닫고, 바자인을 명시적으로 반역죄로 고발하는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군사재판과 말년
바자인의 배신은 독일 포위군을 적시에 풀려나게 했고, 이들은 공화국군이 조직되는 움직임에 맞서기 위해 오를레앙(Orléans)으로 급행군했습니다. 따라서 패배의 도덕적 무게를 바자인에게 지우기는 쉬웠고, 그는 1873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직후 군사법원에 회부되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세당에서 패배했던 바로 그 인물인 새 원수 출신 대통령 마크마옹(Mac-Mahon)에 의해 굴욕 의식 없이 20년 징역형으로 감형되었습니다.
몇몇 공모자들의 도움으로 바자인은 1874년 8월 9일 밤부터 10일 사이 탈옥에 성공해 스페인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는 마드리드에 은신했으나, 1887년 4월 17일 프랑스 행상 루이 이야로(Louis Hillairaud)에게 얼굴에 칼을 찔리는 일을 겪었습니다. 프랑수아 바자인은 1888년 9월 23일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