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 양말 속 저축을 털어 50억 프랑 배상금을 갚다

1871년 6월 16일, 승리의 기세에 부풀어 오른 프로이센 군대가 베를린에서 화려한 개선 행진을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6월 29일, 프랑스에서는 정부 수반 티에르(Thiers)와 맥마옹(Mac-Mahon) 원수가 롱샴(Longchamp)에서 대규모 군사 열병식을 주재했습니다. 12만 명의 완전무장한 병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분열 행진했고, 이는 패전 직후 프랑스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군대를 재건했다는 살아있는 증거였습니다.

베를린의 불편한 심경

그러나 베를린의 프로이센 지도부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가 이토록 짧은 시간 안에 군대를 재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도무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프랑스는 군대 건설보다 무엇보다 먼저, 승자인 자신들에게 지급해야 할 50억 금화 프랑의 배상금부터 갚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티에르의 선택, 국민의 응답

티에르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의 가혹한 조항들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그는 1871년 6월 27일, 연 5% 금리에 발행가 82.50프랑이라는 조건으로 20억 프랑 규모의 공채를 발행했습니다.

결과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발행 당일 하루 만에 33만 명이 넘는 청약자가 몰려들었고, 총 청약액은 목표였던 20억 프랑이 아니라 30억 프랑을 돌파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외국인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조기 상환 협상과 영토 반환

프랑크푸르트 조약은 50억 프랑 배상금의 지급 기한을 3년으로 정해 두었고, 프랑스가 조금씩 갚을 때마다 아직 독일군이 점령 중이던 21개 도 가운데 일부가 순차적으로 해방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프랑스 영토에 주둔한 독일군은 약속을 지키는 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프랑스 국민들은 독일군의 철수를 조바심과 함께 기다렸습니다. 비스마르크가 툴(Toul), 베르됭(Verdun), 벨포르(Belfort) 등에 병력을 계속 묶어두려 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재 대사 곤토비롱(Gontaut-Biron)이 비스마르크와 협상에 나서, 배상금 지급 기한을 앞당기는 대신 동부 지역들의 조기 반환을 추진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한동안 귀를 닫았습니다. 재정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프랑스가 너무 빨리 회복되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1872년 6월 29일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정부는 지급 기한을 앞당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공채, 또 한 번의 기적

그리하여 새로운 공채가 발행되었습니다. 30억 프랑을 목표로 삼았는데, 실제로는 무려 42억 프랑이나 청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공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국가 재정에 엄청난 부담이 된 것입니다. 티에르는 간접세를 대폭 인상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재원을 마련해야 했습니다.

점령의 종언, 1873년

그럼에도 배상금 지급은 규칙적으로 계속되었습니다. 1873년 3월 15일 체결된 새 협약에 따라 다섯 번째 10억 프랑, 즉 최종 분할금은 1873년 6월에서 9월 사이에 지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4개 도 — 아르덴(Ardennes), 보주(Vosges), 뫼르트에모젤(Meurthe-et-Moselle), 뫼즈(Meuse) — 가 해방되었고, 벨포르 지역 역시 함께 반환되었습니다.

끝까지 인질처럼 붙잡혀 있던 베르됭도 마침내 9월에 독일군이 철수하며, 프랑스 영토에 대한 점령의 막이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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