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레데릭 오거서스 테시저, 제2대 첼름스포드 남작: 영국 장군의 생애와 줄루 전쟁

프레데릭 오거서스 테시저, 제2대 첼름스포드 남작: 영국 장군의 생애와 줄루 전쟁

개요

프레데릭 오거서스 테시저, 제2대 첼름스포드 남작(GCB, GCVO, 1827년 5월 31일 ~ 1905년 4월 9일)은 영국 육군 장성으로, 앵글로-줄루 전쟁을 일으켜 영국군이 이산들와나 전투(1879년 1월 22일)에서 역사적인 대패를 당하게 한 인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성장기와 초기 경력

유년 시절

1827년 5월 31일 태어난 프레데릭 A. 테시저는 프레데릭 테시저 경의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로서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제14대 더비 백작) 수상의 신임을 받아 1856년과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대법관(Lord Chancellor)에 임명되었으며, 1대 첼름스포드 남작에 서임되었다. 젊은 테시저는 명문 이튼 스쿨(Eton College)에서 교육을 받았다.

군 입문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길을 꿈꾼 그는 근위 척탄병 연대(Grenadier Guards) 입대를 희망했으나 좌절되고, 1844년 소총여단(Rifle Brigade)에 입대했다. 1845년 노바스코샤 핼리팩스에 주둔하던 중 근위 척탄병 연대의 소위(ensign) 자리를 구매해 전속했고, 같은 해 11월 중위, 1850년 대위로 진급했다.

이후 아일랜드 총독 얼 오브 에글린턴(Lord Eglinton)의 부관(1852년), 아일랜드 사령관 에드워드 블레이니 경(Sir Edward Blakeney)의 부관(1853~1854년)을 지냈다.

성숙기: 크림 전쟁과 식민지 근무

크림 전쟁(1855)

1855년 5월 크림 반도로 건너간 테시저는 소속 대대에서 복무하다 7월 제2사단장 마크햄 중장(Lieutenant-General Markham)의 부관으로 임명되었다. 11월에는 참모부 부참모장(Deputy Assistant Quartermaster General)으로 보임되어 명예 소령(Brevet Major)으로 진급했고, 전공 표창(MiD)을 받았으며, 오스만 제국 메지디에 훈장 5등급과 영국·오스만·이탈리아 크림 전쟁 메달을 수여받았다.

인도와 에티오피아

1857년 정식 대위, 이후 중령으로 진급했다. 1858년 '제95보병연대(더비셔)'로 전속해 세포이 항쟁 진압 막바지에 참여해 다시 전공 표창을 받았다. 1861~1862년 봄베이 부참모장(Deputy Adjutant General)을 지냈고, 1863년 대령으로 진급했다.

1868년 영국 에티오피아 원정 때 다시 부참모장으로 복무한 공로로 바스 훈장 동반자(Companion of the Order of the Bath)와 빅토리아 여왕 부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1869~1874년 동남아시아 참모장(Adjutant General)을 역임했다.

본국 귀환과 남아프리카 부임

1874년 대령으로 본국에 돌아와 숀클리프(켄트)와 올더숏에서 근무하다 1877년 소장, 같은 해 2월 남아프리카 주둔 영국군 사령관에 중장(Lieutenant-General) 계급으로 임명되었다. 1878년 10월 부친 별세로 제2대 첼름스포드 남작 작위를 계승했다.

제9차 코사 전쟁(1878)

1878년 7월 소규모 병력으로 제9차이자 마지막 코사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11월 바스 훈장 기사(KCB)에 서임되었다.

앵글로-줄루 전쟁

전쟁의 배경

1879년 1월 11일, 첼름스포드는 남아프리카 고등판무관 헨리 바틀 프레어 경(Sir Henry Bartle Frere)의 명령으로(런던 정부의 승인 없이) 줄루랜드를 침공했다. 그 배경은 복잡하다.

  • 보어인과의 분쟁: 1865년 줄루 왕위 계승자 체츠와요 카음판데(Cetshwayo kaMpande)는 국경 지대 토지를 보어인에게 양도했다가 그 효력을 다투었고, 퐁골라 강 북쪽에서 충돌 후 나탈 부총독의 중재도 양측이 거부했다.
  • 체츠와요의 친위 정책: 1873년 부친 사망 후 절대 추장이 된 체츠와요는 백인에 적대적이 되어 트란스케이의 코사족, 트란스발의 시쿠쿠니 추장 등 반란 부족을 지원하고, 숙부 샤카의 병제로 군제를 개혁하며 화기를 도입, 선교사 활동을 방해했다.
  • 영국의 남아프리카 연맹 구상: 1874년 제4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Henry Herbert)는 캐나다 연맹 모델을 남아프리카에 적용하려 했다. 보어인의 백인 지배-흑인 노동 체제는 영국의 구상과 배치되지 않았으나, 트란스발 공화국과 줄루 왕국이라는 두 독립 국가가 걸림돌이었다.
  • 프레어의 전쟁 빌미 조성: 1877년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한 프레어는 여러 사건을 빌미로 긴장을 고조시켰다. 투겔라 강(Tugela River)을 국경으로 삼고, 1876년 체츠와요가 결혼을 거부한 소녀들을 처형한 일, 줄루족이 국경을 넘어 도주한 아내들을 잡아 죽인 일, 도로 공사 인부들이 투겔라 강바닥에서 억류된 일 등을 빌미로 1878년 12월 11일 체츠와요에게 사실상 수용 불가능한 최후통첩을 보냈다.

최후통첩 주요 내용: 국경 사건 책임자 인도, 소 수백 마리 벌금, 결혼 자유화, 선교사 활동 보장, 영국인 레지던트 상주, 군대 해산 및 훈련 중단, 국방 문제에 영국 권고 수용. 기한은 1879년 1월 11일까지였다. 체츠와요는 응답하지 않았다.

제1차 침공 (1879년 1월~4월)

첼름스포드는 영국군 6,400명, 원주민 병력 5,000명(줄루 전사 4만 명 대비)을 세 개 종대로 나누어 울룬디(Ulundi, 체츠와요의 수도)로 진격시켰다. 중앙 종대(영국군 1,600, 아프리카인 2,500)는 로크스 드리프트(Rorke's Drift) 도하 후 우기 진흙길로 진격이 지체되어 10일간 10마일(약 16km) 전진에 그쳤다.

이산들와나 전투 (1월 22일)

1월 22일 첼름스포드는 인근에 2만 줄루 전사가 있음을 모른 채 병거 라거(laager, 방어 원형 진지)를 구축하지 않고 병력을 분산해 정찰에 나섰으며, 이산들와나 고개 근처에 1,000명의 본대 병력을 남겨두었다. 2만 줄루 전사가 습격하자 지휘관은 병력을 소규모로 분산 배치하고 탄약 보급도 원활하지 않아 영국군은 궤멸되었다. 영국군 1,300명 전사(줄루 측도 비슷한 피해), 마티니-헨리 소총 1,000정 이상과 탄약 40만 발이 줄루 수중으로 넘어갔다.

같은 날과 이튿날 로크스 드리프트 구호소에서는 4,000 줄루의 공격을 영국군이 격퇴해내며 국민적 충격을 일부 완화시켰다.

동부·서부 종대의 상황

  • 동부 종대(피어슨 대령): 투겔라 강 하구에서 줄루 매복을 격퇴(인예자네 전투)하고 에쇼에(Eshowe) 선교부에 진입해 농성했으나, 첼름스포드의 철수 명령이 줄루의 통신 차단으로 닿지 않아 포위되었다.
  • 서부 종대(에블린 우드 대령): 흘로바네 산(Hlobane) 근처 크랄(kraal, 요새화된 진지)에서 4,000 줄루 임피(impi, 군단)를 공격하려다 이산들와나 패배 소식을 듣고 크랄로 철수, 유일하게 온전한 병력이 되었으나 공세 불능 상태였다.

제1차 침공의 종결

  • 은톰베 전투(3월 12일): 보급 수송대가 줄루의 밀집 대형 돌격에 전멸당했다. 줄루의 충격 전술 위력이 드러났으나 현대 화기 아래 막대한 손실도 입었다.
  • 본국 여론과 정치권: 이산들와나 참패 소식에 영국 정계는 경악했다. 자유당 의원들은 프레어와 첼름스포드 해임을 요구했으나, 수상 베컨스필드(디즈레일리)는 이들을 유임시키고 가넷 울즐리 경(Sir Garnet Wolseley)을 후임으로 파견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선 악화, 발칸 화약고, 러시아의 팽창 등 제국 전반의 위기감이 작용했다.
  • 체츠와요의 호기 상실: 체츠와요는 중앙 종대를 전멸시키고 첼름스포드를 생포할 기회를 놓쳤으며, 국경 밖으로 진출하지 않아 영국군 재정비 시간을 허용했다.
  • 첼름스포드의 반격: 3월 7일 더반에 증원군 7개 연대와 포병 2개 중대 상륙. 3월 29일 첼름스포드는 3,400 영국군, 2,300 원주민 병력으로 에쇼에 구출에 나섰으며, 매 야영지마다 참호를 팠다. 4월 2일 긴들로부 전투(Battle of Gingindlovu)에서 줄루 1,200명 사살(영국군 2명 전사, 52명 부상)로 격퇴하고 3일 에쇼에 포위 해제, 5일 철수.
  • 흘로바네·캄불라 전투(3월 28~29일): 불러 중령(Redvers Buller) 지휘 675명(스태퍼드셔 지원병·보어인)이 흘로바네 산 줄루 진지 공격했으나 26,000 줄루 증원에 격파(흘로바네 전투, 영국군 100명 전사). 이튿날 25,000 줄루가 우드 대령의 크랄(2,000명 수비) 공격했으나 영국군 참호 방어에 격퇴(캄불라 전투, 줄루 2,000명 손실 vs 영국군 29명).

결과적으로 4월 초 첼름스포드 군은 출병 지점으로 되돌아왔으며, 영국군 1,000명 이상 전사, 막대한 물자 손실, 대영제국 육군의 위신 추락을 초래했다.

제2차 침공과 결말 (1879년 6~7월)

울즐리 경이 1874년 제3차 영-아샨티 전쟁의 공로로 후임 사령관에 임명되자, 첼름스포드는 그 도착 전 줄루를 끝내려 16,000 영국군, 7,000 원주민 병력, 마차 600대, 소 8,000두, 포병과 개틀링 건을 동원해 6월 재침공했다. 이 무렵 나폴레옹 3세의 아들 루이 나폴레옹 황태자(Prince Imperial)가 정찰 중 전사해 영불 양국에 충격을 주었다.

체츠와요의 강화 제의를 거부하고 울즐리의 경고도 무시한 채 강행군으로 울룬디에 도달한 첼름스포드는 이번엔 보병 방진(square) 전술을 채택해 7월 4일 울룬디 전투에서 줄루를 격파하고 수도를 불태웠다. 7월 15일 울즐리에게 지휘권을 이양했다.

  • 체츠와요는 포로로 런던 압송, 왕조 폐지, 왕국 분할.
  • 프레어 경 해임, 1880년 제1차 보어 전쟁 참패로 경력 마감.
  • 글래드스톤 수상(1880년 취임)은 귀국한 첼름스포드 알현을 거부해 공개적 모욕을 주었으나, 빅토리아 여왕 중재로 면담이 성사되었으나 냉랭하게 끝났다. 울즐리는 전보에서 울룬디 승리의 공을 첼름스포드에게 돌렸다.
  • 북나탈에 영국인 레지던트(멜모스 오즈번) 부임했으나, 폐위 왕 추종파와 토지 분배받은 추장들 간 분쟁을 막지 못했다.
  • 영국은 1882년 체츠와요를 복위시켰으나, 1883년 경쟁자 우지베푸(Uzibepu)가 백인 용병을 앞세워 울룬디를 함락, 체츠와요는 부상당해 도주 후 에쇼에에서 사망.

말년과 사망

울즐리의 전보 덕분에 첼름스포드는 바스 훈장 대십자(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를 받았다. 이후 1882년 중장, 1884~1889년 런던탑 부총독(Lieutenant of the Tower of London), 1887년 제4(서런던) 소총 지원군 연대장, 1888년 대장, 1889년 더비셔 연대장(1900년 제2생명근위병 연대장으로 전속), 1902년 빅토리아 왕립 훈장 대십자(GCVO)를 받았다. 생애 말년까지 교회 소년단(Church Lads' Brigade) 총재로 활동했다.

1905년 유나이티드 서비스 클럽에서 당구 치다 뇌졸중으로 별세. 브롬프턴 묘지(런던)에 안장되었다.

가족

  • 누이 줄리아 셀리나(1833~1904)는 1857년 러크나우 포위전 지휘관 존 이어들리 윌모트 잉글리스 경(Sir John Eardley Wilmot Inglis)과 결혼, 포위 중 일기를 출간했다.
  • 테시저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장남 프레데릭 테시저는 식민지 행정가로 출세해 인도 총독(Viceroy of India)과 초대 첼름스포드 자작(1st Viscount Chelmsford)이 되었다. 손자 에릭은 빅토리아 여왕 시동(Page of Honor)을 지내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중령으로 복무했다.

대중문화 속 첼름스포드와 앵글로-줄루 전쟁

  • 이산들와나 전적지: 시신 더미가 발견된 자리에 케른(cairn, 돌무덤)이 세워졌으며, 전투 직후 며칠간 독수리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는 증언이 있다.
  • 제24보병연대: 빅토리아 여왕이 줄루랜드에서 싸운 제24보병연대를 '고귀한 제24연대(the Noble 24th)'라 칭함. 연대 유물(이산들와나 전투 후 강에서 발견된 연대기, 빅토리아 십자 훈장 등)은 웨일스 브레콘(Brecon)에 전시.
  • 울위치 기념비: 리포지토리 로드(Repository Road)에 영-아프간·영-줄루 전쟁 전사자 기념 메갈리스가 서 있으며, 아프간·줄루 무기 트로피가 양옆에 있다.
  • 영화 <줄루의 새벽>(Zulu Dawn, 1979): 피터 오툴(Peter O'Toole) 분한 첼름스포드를 오만하고 인종차별적이며 냉소적인 장군으로 묘사. 존 밀스(John Mills) 분한 프레어와 함께 전쟁을 '산책'쯤으로 여기며 줄루 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함.
  • 사이 엔필드(Cy Enfield) 각본: 첼름스포드의 무능을 부각: 라거 미구축, 주력 부대 정찰 중 줄루 주력 은밀 접근 방치, 후임 지휘관 미지정, 부하들이 학살당하는 와중 원거리에서 피크닉. 참패 책임을 전사자 앤서니 더넌포드 대령(Anthony Durnford)에게 전가.
  • 임피(Impi) 노래: 조니 클레그(Johnny Clegg)와 줄루카(Juluka) 오케스트라의 곡 '임피'가 남아공 비공식 애국가처럼 불림, 특히 남아공-영국 스포츠 경기 때 관중 합창.
  • 도로명 변경: 더반의 '첼름스포드 로드'가 2007년 남아공 공산당원 J.B. 마크스(1972년 모스크바 사망) 이름으로 개명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