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의 작가, 제국주의의 시인,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

러디어드 키플링: 정글북의 작가, 제국주의의 시인, 그리고 노벨상 수상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

개요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865년 12월 30일~1936년 1월 18일)은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생을 마감한 영국의 작가다. 아동문학의 고전 '정글북(The Jungle Book, 1894)'과 '김(Kim, 1901)', 시 '만달레이(Mandalay)', '군가 딘(Gunga Din)', 그리고 인생의 지침을 담은 시 '만약에(If—, 1910)'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영어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명이었던 그는 1907년, 영어권 작가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당시 42세로 역대 최연소 수상 기록을 세웠다. 헨리 제임스는 그를 "내가 만난 가장 완전한 천재"라 평했고, 조지 오웰은 "대영제국주의의 예언자"라 불렀다. 그의 작품은 제국주의적 편견과 군국주의 논란 속에서도, 식민지 시대의 삶을 탁월하게 포착한 서사적 천재성으로 오늘날까지 문학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유년 시절: 두 세계 사이의 아이

조셉 러디어드 키플링은 앨리스 맥도널드와 존 록우드 키플링(조각가이자 봄베이 지줍보이 미술산업학교 교수)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영국 스태퍼드셔의 러디어드 호수 근처에서 만나 호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키플링의 부모는 스스로를 '앵글로-인디언'이라 여겼고, 이러한 복합적 정체성은 그의 소설 전반에 걸쳐 국가 충성과 정체성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는 밑바탕이 되었다.

로른 로지의 악몽

6세가 되던 해, 당시 영국 식민지 관료의 자녀들이 겪던 관례에 따라 키플링과 세 살 터울의 누이 앨리스(트릭스)는 영국 포츠머스 사우시의 로른 로지로 보내졌다. 캡틴 할로웨이 부부가 운영하는 이 기숙 집에서 두 아이는 6년간 지냈는데, 키플링은 자서전 '나 자신의 일부(Something of Myself, 1935)'에서 이 시기를 "어둠과 가혹한 빛"이라 회고했다. 특히 할로웨이 부인은 키플링을 잔혹하게 학대했고, 그는 이를 "종교적이고 과학적으로 자행된 고문"이라 표현했다.

"모순을 거짓말이라 단정 짓고 아침 식탁에서 보고하게 한다면, 삶은 쉽지 않다. 나는 상당한 괴롭힘을 견뎌야 했다. 하지만 이는 훗날 거짓말을 꾸며내는 데 신중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나는 이것이 문학적 경력의 좋은 기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크리스마스마다 런던 풀럼의 버른-존스 부부 집에서 보내는 한 달은 그에게 "진정으로 구원받은 낙원"이었다. 1877년 어머니가 인도로부터 돌아와 아이들을 데려가기 전까지 이 고통은 계속되었다.

기숙학교와 첫사랑

1878년, 데번의 웨스트워드 호에 있는 유나이티드 서비스 칼리지에 입학했다. 군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이 학교에서 초기 적응은 어려웠으나, 평생의 친구들을 만났고 훗날 '스토키 앤 컴퍼니(Stalky & Co.)'의 소재가 되었다. 이곳에서 플로렌스 개러드를 만나 첫사랑을 경험했는데, 그녀는 키플링의 첫 소설 '사라지는 빛(The Light That Failed, 1891)'의 주인공 메이지의 모델이 되었다.

옥스퍼드 진학을 위한 장학금 획득에 실패하고, 가정 형편상 대학 진학이 어려워지자 아버지 주선으로 인도 라호르의 '시빌 앤 밀리터리 가제트(Civil & Military Gazette)' 부편집장 자리를 얻어 1882년 10월 인도로 귀환했다.

청년기: 인도에서의 문학적 각성

기자 생활과 첫 작품들

라호르의 가제트는 주 6일 발행되었고, 키플링은 편집장 스티븐 휠러의 엄격한 감독 아래 글쓰기에 몰두했다. 1886년 첫 시집 '부서별 시편(Departmental Ditties)'을 출간했고, 새 편집장 케이 로빈슨의 지원으로 단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심라: 제국의 여름 수도

1883년 처음 방문한 심라(심라)는 1864년부터 영국령 인도의 여름 수도로, 6개월간 총독과 정부가 머무는 "권력과 쾌락의 중심지"였다. 키플링 가족은 1885~1888년 매년 심라에서 휴가를 보냈고, 이곳의 식민지 상류 사회 풍속은 그의 가제트 연재 소설에 빈번히 등장한다. 그는 이곳의 한가한 영국인들 사이의 연애 게임을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

프리메이슨 입문과 다작의 시기

1886년 4월, 21세 미만임에도 펀자브 지방 그랜드 마스터의 특별 허가로 '희망과 인내 롯지 No. 782'에 입문해 마스터 메이슨이 되었고, 이후 로열 아치 메이슨 등급까지 올랐다.

1886년 11월부터 1887년 6월까지 가제트에 약 40편의 단편을 발표했고, 이는 1888년 1월 캘커타에서 출간된 첫 산문집 '평야의 소박한 이야기들(Plain Tales from the Hills)'로 묶였다. 같은 해 11월 알라하바드의 자매지 '더 파이오니어(The Pioneer)'로 전근된 후 1년간 6권의 단편집(총 41편)을 쏟아냈고, 라자스탄 취재 기사는 '바다에서 바다로(From Sea to Sea)'에 실렸다.

세계 일주와 런던 데뷔

1889년 초 더 파이오니어와 분쟁 끝에 퇴사한 키플링은 원고료와 퇴직금을 마련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 미국과 캐나다를 횡단하며 기사를 썼다. 옐로스톤, 나이아가라 폭포, 뉴욕, 보스턴을 거쳐 마크 트웨인을 엘마이라에서 만나 "위압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1889년 10월 리버풀에 도착해 런던 문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문학적 전성기와 결혼

월컷 발레스티어와의 만남

빌리어스 가에 거처를 정한 키플링은 첫 장편 '사라지는 빛' 출간 후 우울증에 시달렸다. 미국인 작가이자 문학 에이전트인 월컷 발레스티어를 만나 공동 집필한 '나울라카(The Naulahka)'를 썼고, 1891년 의사의 권유로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인도를 여행하던 중 발레스티어가 장티푸스로 급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즉시 런던으로 돌아와 발레스티어의 여동생 캐리와 결혼을 약속했다.

결혼과 신혼여행의 시련

1892년 1월 18일, 런던 독감 유행으로 "장례마차에 검은 말이 없어 갈색 말을 써야 했던" 날, 헨리 제임스의 배웅 속에 올 소울즈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으로 미국 버몬트의 캐리 가족 방문 후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했으나, 거래 은행인 뉴 오리엔탈 뱅킹 코퍼레이션의 파산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미국 버몬트 시절: '정글북'의 탄생

블리스 코티지와 나울라카 하우스

버몬트 브래틀보로 인근에 월 10달러짜리 작은 집 '블리스 코티지(Bliss Cottage)'를 얻어 살림을 시작했다. 1892년 12월 29일, 3피트 눈이 쌓인 밤에 첫딸 조세핀이 태어났다. 키플링은 이 좁은 서재(7×8피트)에서 인도 산림 이야기를 쓰던 중, 어린 시절 읽은 잡지의 '메이슨 라이온'과 라이더 해거드의 소설 '나디아, 백합'의 한 구절이 결합하며 모글리 이야기의 영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딸이 태어나자 집이 비좁아졌고, 처남 비티 발레스티어에게서 10에이커 땅을 사서 코네티컷 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 언덕에 '나울라카(Naulakha)'라는 집을 지었다. '나울라카'는 힌디어로 '아홉 라크(90만 루피)'를 뜻하며, 북인도 민담에 나오는 왕비의 목걸이, 즉 '값진 보석'을 의미한다.

창작의 황금기

이 '건강하고 깨끗한' 버몬트 생활 4년 동안 키플링은 '정글북' 2권, 단편집 '하루의 일(The Day's Work)', 장편 '용감한 선장들(Captains Courageous)', 시집 '일곱 바다(The Seven Seas)'와 '병영 노래(Barrack-Room Ballads, 만달레이·군가 딘 수록)'를 발표했다. 아서 코난 도일이 골프채를 들고 48시간 머물며 골프를 가르쳐주기도 했고, 키플링은 눈밭에서 빨간 공으로 골프를 치다 공이 강까지 굴러가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버몬트를 떠나게 된 두 사건

1896년 둘째 딸 엘시가 태어났으나 부부 관계는 이미 권태기에 접어들었다. 키플링은 친구에게 "결혼은 가장 힘든 미덕, 겸손과 자제, 신중함을 가르친다"고 썼다.

결정적으로 두 사건이 이들을 버몬트에서 쫓아냈다. 첫째, 1895년 베네수엘라-영국 국경 분쟁에 미국이 먼로 독트린을 내세워 중재를 강요하며 영미 간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고, 미국 내 반영 감정이 고조되자 키플링은 "즐거운 식사 중 얼굴에 물병을 던지는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둘째, 1896년 1월 공식 전기작가에 따르면 이 "좋은 공기의 삶"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데번 귀향과 제국주의 시인

토키 시절

1896년 9월 영국으로 돌아와 데번 토키의 언덕 위 바다 조망 집에 정착했다. 키플링은 집의 방향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며 싫어했으나, 사회·문학 활동은 왕성했다. 이 시기에 정치적 관심이 깊어져 두 편의 논쟁적 시를 발표했다.

  • '회고(Recessional, 1897)':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을 맞아 제국의 오만함을 경고
  •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 1899)': 필리핀을 점령한 미국에 보낸 충고로, 제국주의 찬가냐 계몽적 의무론이냐, 혹은 냉소적 풍자냐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이 시기에 기숙학교 추억을 담은 '스토키 앤 컴퍼니'를 출간했고, 자녀들에게 읽어주며 스스로 웃음 터뜨리곤 했다고 한다.

남아프리카와의 인연

1898년부터 1908년까지 겨울마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방문해 세실 로즈, 알프레드 밀너, 레안더 제임슨 등 유력 정치인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지지했다. 제2차 보어 전쟁(1899~1902) 중엔 영국군을 위한 신문 '더 프렌드(The Friend)' 창간을 도왔고, 독일 함대 증강에 대응한 영국의 해군 정책을 다룬 '존재하는 함대(A Fleet in Being)'를 연재했다.

아동문학의 또 다른 고전

토키에서 구상해 1902년 출간한 '바로 그 이야기들(Just So Stories for Little Children)'은 이듬해 나온 대표작 '김'과 함께 그의 아동문학 입지를 굳혔다. 1899년 미국 체류 중 장녀 조세핀이 폐렴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문학적 절정: 노벨상과 '만약에'

1907년 노벨 문학상 수상

20세기 첫 10년, 키플링은 명성의 정점에 있었다. 1907년 노벨 문학상은 "관찰력, 독창성, 사상적 활력, 탁월한 서사적 재능"을 기리며 수여되었고, 영어권 최초 수상자였다. 스웨덴 아카데미 상임비서 C.D. 아비르센은 "영문학의 가장 위대한 서사 천재"라 칭송했다.

후기 걸작들

이 시기의 문학적 결실은 '푸크 언덕의 요정(Puck of Pook's Hill, 1906)'과 '보상과 요정들(Rewards and Fairies, 1910)' 두 작품집이다. 후자에 실린 시 '만약에(If—)'는 앙드레 모루아가 1918년 '너는 사람이 되리라, 내 아들아'로 번역했고, 1995년 BBC 조사에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1위에 올랐다. 자제와 금욕을 역설하는 이 시는 키플링의 스토아적 인생관을 집약한다.

아일랜드 자치 반대 입장에서 얼스터 연합주의 지도자 에드워드 카슨을 지지하며 1912년 시 '얼스터(Ulster)'를 썼고, 50만 명이 서명한 '얼스터 서약'을 기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상실과 속죄

아들의 전사

19세기 말 유럽 문명의 낙관주의와 동일시되던 키플링의 명성은 1차 대전으로 추락했다. 전쟁 선전국 활동을 하며 벨기에 참상을 목격했고, 1915년 루스 전투에서 중위인 아들 존 키플링을 잃었다. 아들은 근시로 불합격 판정을 받았으나 키플링의 도움으로 아일랜드 근위대에 입대했었다.

"누구든 우리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면 / 말해주라: 우리 아버지들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아들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전몰자 묘지 위원회와 추모 사업

이 비극은 키플링을 파비안 웨어 경이 창설한 제국 전몰자 묘지 위원회(현 영연방 전몰자 묘지 위원회)로 이끌었다. 그는 성경 구절 "그들의 이름은 영원히 살리라(Their name shall live forever)"를 주요 기념비 비문으로 채택했고, 무명 용사의 묘비에 "하나님만이 아신다(Known of God)"라는 문구를 남겼다. 아들 부대였던 아일랜드 근위대 연대사(1923)를 집필해 "가장 훌륭한 연대사"라는 평을 들었고, 단편 '정원사(The Gardener)'로 전몰자 묘지 순례를 그렸다.

말년과 유산

다양한 활동

자동차 애호가였던 키플링은 자동차 칼럼니스트로 여행기를 연재했고, 1922년 토론토 대학 교수의 요청으로 캐나다 공학도들의 '엔지니어의 서약(The Ritual of the Calling of an Engineer)'을 제정해 오늘날까지 철제 반지를 수여하는 전통을 만들었다. 같은 해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 대학 총장(1922~1925)으로 J.M. 배리의 후임을 맡기도 했다.

죽음과 안식

1930년대 초까지 집필을 이어갔으나 속도와 성공은 줄어들었다. 1936년 1월 18일, 런던 미들섹스 병원에서 위궤양 출혈로 70세에 별세했다. 이틀 뒤 조지 5세도 서거했다. 생전 한 잡지가 부고를 잘못 내자 "내가 죽었다고 읽었다. 구독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지워달라"는 위트로 답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유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시인의 코너(Poets' Corner)에 안치되어 영국 문단의 거장들과 영면하고 있다.

주요 작품 연보

  • 평야의 소박한 이야기들 (Plain Tales from the Hills, 1888)
  • 정글북 (The Jungle Book, 1894)
  • 제2 정글북 (The Second Jungle Book, 1895)
  • 용감한 선장들 (Captains Courageous, 1897)
  • 김 (Kim, 1901)
  • 바로 그 이야기들 (Just So Stories for Little Children, 1902)
  • 푸크 언덕의 요정 (Puck of Pook's Hill, 1906)
  • 보상과 요정들 (Rewards and Fairies, 1910) — 시 '만약에' 수록
  • 아일랜드 근위대 연대사 (The Irish Guards in the Great War, 1923)
  • 자서전: 나 자신의 일부 (Something of Myself, 1937, 사후 출간)

평가와 유산

키플링은 "열렬한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작가"이자 "문학적·문화사적 위상이 여전히 논쟁적인 존재"(더글러스 커)로 남았다. 제국주의 옹호자이자 동시에 그 몰락을 예감한 증언자, 아동문학의 거장이자 성인 독자를 위한 예리한 풍자가, 식민지 지식인의 고통을 체현한 작가이자 제국 기득권의 대변자라는 모순적 면모가 공존한다.

그러나 제국이 물러간 시대에, 그가 보여준 "식민지 삶에 대한 비교 불가능한 해석"과 "비범한 서사적 천재성"은 부정할 수 없는 문학적 힘으로 남아 있다. 정글북의 모글리, 김의 김볼 오하라, '만약에'의 스토아적 화자는 오늘날에도 전 세계 독자들에게 제국주의 시대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비추며 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