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사라 베른하르트: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죽는 법’을 알았던 전설의 비극 여왕

사라 베른하르트: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죽는 법’을 알았던 전설의 비극 여왕

“사랑이란 한 번의 시선, 한 번의 격정, 그리고 그것을 닦아내는 일이다.”

불우한 유년, 그리고 무대에서 받은 첫 주목

사라 베른하르트(Sarah Bernhardt)는 1844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유대인 가정의 사생아였던 그녀는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버려지다시피 자랐다. 누구의 시선에도 닿지 않는,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보이지 않는 아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마르고 중성적인 분위기를 띤 그녀의 외모는 당대의 미의 기준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연극 무대에 발을 들이면서 찾아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주목받은 경험을 한 사라 베른하르트는 그 감각을 잊지 못했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공하겠다고 결심한다. 초년 시절 그녀는 고급 창부(courtesan)였던 어머니처럼 매춘에 가까운 생활 속에서 기회를 얻어야 했다. 그녀는 이 불행한 시절을 철저히 감춘 채, 눈부신 속도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나는 싸움에 나설 무장을 갖췄다. 헛되이 흘러간 인생의 후회 속에서 서서히 꺼져가느니, 차라리 싸움 한가운데서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비극의 화신, 세계를 매료시키다

사라 베른하르트는 프랑수아 코페의 시극 『행인(Le Passant)』에서의 눈부신 연기로 성공을 거두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커리어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스물다섯 무렵이었고, 그 무대는 곧 세계 규모로 확장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역할들에서 열정적이고, 때로는 광적으로 격렬했던 그녀는 관객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배우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이 눈물의 홍수 속으로 빨려 들어가도록 만드는 데 집착했다. 그녀는 원문의 언어이자 작품의 원래 언어인 프랑스어로 공연하는 원칙을 지키며 미국과 러시아까지 월드투어를 돌았다.

또한 그녀는 여성 역할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중성적인 몸을 활용해 남장하고 남성 역까지 소화해냈다. 하지만 관객을 가장 열광하게 만든 것은 단연 사라 베른하르트의 ‘죽음’이었다. 비극 배우는 임종과 죽음의 연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공연 때마다 무대 위에서 죽었다. 죽음을 섬뜩할 만큼 정확하게 재현해내는 능력에 세계는 매료되었다. 장 라신의 동명 비극에서 페드르(Phèdre) 역,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가 쓴 희곡의 제목이기도 한 살로메(Salomé) 역은 오늘날까지 그녀의 대표 연기로 기억된다. 1872년 빅토르 위고의 『루이 블라스(Ruy Blas)』에서 여왕 역을 맡으면서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19세기 후반 극작가들의 동시대인이었던 그녀는 수많은 작가들과 교류했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에드몽 로스탕은 1895년 『먼 나라의 공주(La Princesse Lointaine)』를 쓰면서 주역을 그녀를 위해 마련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인생의 번뇌와 걱정을 던져버릴 수 있다. 자신의 성격을 벗어던지고 다른 인물을 입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은 채 또 다른 삶의 꿈속을 거니는 것이다.”

영화로의 확장, 짓밟힌 명예, 그리고 마지막 무대 위의 죽음

20세기의 문이 열리자 사라 베른하르트는 새로운 예술인 영화로 영역을 넓혔다. 무대를 밀어올린 그 열정 그대로, 1900년에는 햄릿(Hamlet) 역을 연기하며 처음으로 카메라에 담겼다.

커리어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녀는 지나치게 집요한 기자들과 열광하는 추종자들에게 시달렸고 혹평이 쏟아졌다. 특히 도드라진 코를 과장해 그린 그녀의 풍자화들은 성공한 유대인 여성에 대한 멸시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1914년, 그녀가 참호 속 병사들(‘푸이뤼’)과 함께 조국을 지지하며 섰을 때 비난은 찬사로 바뀌었다. 1915년 병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뒤에도 그녀는 무대를 포기하지 않았다.

1923년, 촬영 도중 사라 베른하르트는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야말로 막이 내린 뒤에도 다시 일어나지 않는, 진짜 죽음이었다. 그녀가 관에 누워 있는 사진이 퍼지며 온 나라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프랑스 전체가 애도에 빠졌고, 장송 행렬이 사라 베른하르트 극장 앞을 지날 때 국민은 그녀에게 마지막 경의를 표했다.

“미움은 아주 조금만 하는 것이 좋다. 너무 지치기 때문이다. 경멸은 넉넉히 하되, 자주 용서하고 결코 잊지 말라. 용서가 곧 망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