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 세당의 참패와 제2제국의 몰락

1870년 7월 3일, 호엔촐레른 가문의 왕자가 스페인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프랑스는 전쟁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 프랑스의 눈에 프로이센은 전통적인 합스부르크식 정치를 부활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는 왕조적 이유로 자국 출신인 몽팡시에 공작의 스페인 왕위 입후보를 거부해 왔는데, 이제는 독일 황자에게 위협받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상태였으며, 진정한 정치가의 조언과 계몽된 여론의 지지를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 하나도 갖지 못했다.

전쟁으로 치닫는 외교

자유주의 장관 올리비에는 어떤 전제주의 장관 못지않게 국익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해방시킨 여론의 압력에 밀려 전쟁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 준비에 나섰다.

1870년 7월 6일 그라몽 외무장관이 입법부 앞에서 강경 선언을 하자 유럽은 경악했고, 각국은 프랑스 외교의 노력을 지원하여 호엔촐레른 가문의 입후보 철회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는 파리의 주전론자들도, 비스마르크도 바라던 결과가 아니었다. 양측은 각자 자기들 방식으로 전쟁을 선포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라몽이 빌헬름 1세에게 장래의 선행(善行)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경솔한 발언은 비스마르크에게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비스마르크는 국왕의 거절 의사를 담은 전문(電文)을 수정·윤색하여 모욕으로 만들었고, 이른바 '엠스 전보 사건'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프랑스 의회는 티에르와 감베타의 필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246표 대 10표로 전쟁에 찬성했다.

완벽한 외교적 고립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기만과 비스마르크의 술책이 겹치면서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었다. 1866년 8월 22일 이후 뮌헨과 슈투트가르트 회의에서 나폴레옹이 헤센과 바이에른 영토에 대한 야심을 서면으로 밝혔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남독일은 프랑스에서 멀어졌고, 오히려 남부 여러 국가가 프로이센과 군사 협약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유사한 실수의 연속으로 유럽의 다른 국가들도 프랑스에게 등을 돌렸다. 1863년 폴란드 봉기 이후 프로이센과 가까워지려 하던 러시아는, 같은 무분별함 덕분에 나폴레옹이 슈투트가르트에서 한 약속을 얼마나 성실하게 지켰는지 불쾌하게 알게 되었다. 러시아는 1856년 크림 전쟁 패배의 설움을 누를 기회로 삼아 호의적 중립을 표명했다. 또한 1867년 베네데티 대사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노린 구상을 폭로당하면서 영국 역시 프랑스에 적대적인 중립 입장을 굳혔다.

동맹 구상의 실패

황제는 잘츠부르크 회담(1867년 8월) 이후 협상을 이어 온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동맹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1859년과 1866년 두 차례나 프랑스에 패배를 당한 터라 전쟁에 즉시 합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유예 기간을 요청했다. 이탈리아의 우호는 로마에서 프랑스군이 철수하는 조건으로만 얻을 수 있는 상태였다.

결국 멘타나 전투에서의 샤스포 소총 사용, 루에르의 "결코 안 된다"는 선언, 그리고 이탈리아에 수도의 문을 열지도 모르는 비밀 조항에 대해 가톨릭 신앙이 깊은 황후 외제니가 보인 강한 반대는, 프랑스에서 마지막 친구마저 잃게 만들었다.

무너진 군대, 거듭된 패배

르뵈프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그라몽의 외교만큼이나 무능했다. 고위 장교들의 무능, 참모본부의 전쟁 준비 부족, 지휘관들의 무책임, 비상 계획의 부재, 그리고 정교한 전략 수립 대신 운에 의존하려는 태도—지금까지는 황제에게 통했던 방식—는 개전 초기 자르브뤼켄의 사소한 교전에서부터 바로 드러났다.

프랑스군은 패배를 거듭했고, 프뢰슈빌레르(뵈르트), 보니콜롬베, 마르라투르, 생프리바 등 활용하지 못한 승리들을 되살리지 못한 채, 결국 메츠에서의 대참사로 치달았다.

세당의 항복과 제정의 붕괴

세당 전투에서의 항복은 제정이 의지하던 마지막 지주인 군대를 잃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파리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남았다. 튈르리 궁에는 황후 외제니 홀로 남아 있었고, 부르봉 궁의 의회는 공포에 떨고 있었으며, 팔리카오 내각은 아무런 권위도 행사할 수 없었다. 야당 지도자들은 재난이 닥치자 도피했다.

1870년 9월 4일, 파리 시청(호텔 드 빌)에 모인 공화파 의원들은 임시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제2제정은 무너졌고, 황제는 독일의 포로가 되었으며, 프랑스는 새로운 시대인 제3공화국의 시대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