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이 그때까지 기반으로 삼아 온 신뢰는 대부분 증발하고 말았다. 야당의 대변자였던 티에르와 쥘 파브르는 1866년의 외교적 오류를 공개적으로 규탄했으며, 에밀 올리비에는 헌법 제45조 수정안을 통해 공식 다수파마저 분열시키며 황제가 정권을 진정으로 자유화하기 전까지는 제국과의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1864년 협약에 따라 로마 주둔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교황청의 지원을 받는 울트라몽트(교황 절대주의)파는 새로운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나폴레옹 3세는 1860년의 개혁을 한 단계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고, 1867년 1월 19일 칙령을 반포했다. 루에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에와의 비밀 합의를 통해 질문권이 의회에 반환되었으며, 언론 감독 개혁과 집회의 자유 역시 약속되었다.
그러나 루에르가 자유주의 야당에 맞서 제국 방위 조직인 왕조연합을 결성하려 한 노력은 헛되이 끝났다. 연이은 국제적 좌절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1867년, 재앙의 해
1867년은 제국에게 특히 참담한 해였다.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최후통첩 앞에서 굴욕적인 철수로 끝나며 '멕시코 황제 옹립'이라는 웅대한 구상이 무너졌다. 한편 이탈리아는 프로이센과의 새로운 동맹에 편승해 과거의 약속을 잊은 채, 로마를 정복하여 통일을 완성하고자 혁명 세력을 동원했다. 결국 멘타나 전투에서 샤스포 소총의 화력이 아니었더라면 가리발디 추종자들을 저지하기 어려웠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제국 외교는 승전보 비스마르크에게 라인 지방·벨기에·룩셈부르크에서의 영토 보상을 요청하다가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는 원래 비아리츠 회담 당시 충분히 얻을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그러나 베네데티가 어처구니없게도 가장 불리한 시점에 요청을 시도하면서, 프랑스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굴욕을 감수해야 했다.
만국 박람회의 영광과 그림자
같은 시기 프랑스는 유럽 전체를 매료시키는 위상 외교를 구가하고 있었다. 바르옹 오스만이 현대 도시로 탈바꿈시킨 파리, 예술과 문화의 수도에서 개막한 1867년 만국 박람회는 유럽 각국의 군주들과 무려 1천만 명의 방문객을 맞이하며 화려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성공은 베레조프스키가 러시아 차르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려 한 미수 사건과, 멕시코에서 불운한 황제 막시밀리안이 맞이한 비극적 최후로 인해 상당 부분 빛을 잃었다. 티에르는 다소 과장된 어조로 "더 이상 실수할 여지가 없다"고 외쳤다. 그럼에도 황제는 또 하나의 실수를 저지르고야 말았다.
입헌 제국으로의 전환과 무모한 전쟁 선택
늙고 병든 황제였음에도 나폴레옹 3세는 입헌 제국의 수립이라는 대전환을 감행했으며, 그 선택에 따르는 위험 속에서 지난 20년간 쏟아부은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끌어냈다. 그러나 여론을 확실히 되돌리려면 결정적인 국제적 성공이 필요했다. 실제로 여론은 1870년 국민투표에서 드러났듯 정권의 자유주의적 전환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문제는 조언이었다. 형편없는 조언에 둘러싸인 황제는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정권을 영구히 안정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필요한 군사적 준비조차 갖추지 않은 채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부스트 백작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지원을 받아 1866년 이후 나폴레옹이 버렸던, 상호 군축에 기반한 현상 유지 결의안을 되살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나폴레옹은 베를린 주재 무관 스토펠 대령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를 거부했다. 스토펠은 프로이센이 군축을 결코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겉으로 드러낸 것보다 훨씬 깊은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고, 군제 개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샬 니엘은 보나파르트파 야당으로부터도, '전제자를 강화한다'며 반대한 공화파로부터도 군제 개편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양 진영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에 눈이 멀어 외부의 위험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한 것이다.
고립된 황제, 결집된 반대 세력
황제는 사람들에게 버려졌고, 사건들에 배신당했다. 언론의 자유를 부여하고 집회를 허용하면서도 행동의 자유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 희망했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고 오히려 적들의 호기에 알맞은 판을 깔아준 셈이었다.
빅토르 위고의 『샤티망(Les Châtiments)』, 로슈포르의 신문 『라 란턴느(La Lanterne)』, 1851년 바리케이드에서 살해된 의원 보댕을 위한 기념비 성금 모금 운동, 그리고 샤를 들레클뤼즈 재판을 계기로 한 레옹 감베타의 제국 탄핵 연설은 곧 공화당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었다.
한편 오를레앙파는 보호받아 온 산업계가 자유무역 개혁에 만족하지 못하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노동계급 또한 아무런 결실도 가져다주지 않았던 정치적 중립을 버리고 적진으로 넘어섰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이 공산주의의 예속성에 대해 펼친 이성적 비판을 외면한 채, 노동자들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내걸린 카를 마르크스의 집단주의 이론과 바쿠닌의 혁명 이론에 점차 이끌렸다.
금지 조치가 오히려 명성을 높인 이 대회들에서,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은 정치적 해방과 불가분하다는 원칙이 확인되었다. 그렇게 인터내셔널 진영과 부르주아 공화파의 연합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1869년 선거의 패배와 의회제로의 전환
기습을 당한 제국은 중산계급과 노동계급을 동시에 회유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두 계급을 혁명적 행동으로 몰아넣었다. 파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이러한 소요 속에 치러진 1869년 5월 선거는 제국에 중대한 도덕적 패배를 안겼다. 야당이 40%를 득점한 것이다. 물론 농민의 지원이라는 근간은 유지되었다.
'붉은 공포' 덕분에 정부가 연명되었음에도, 화해의 기치를 내건 올리비에는 파리에서 낙선했고, 불굴의 공화파 40명과 제3당 의원 116명이 의회에 진출했다. 그들에게 양보가 불가피했다. 그리하여 1869년 9월 8일의 원로원 칙령(sénatus-consulte)으로 의원내각제 군주정이 전제 통치를 대체했으며, 1870년 1월 2일 올리비에는 최초의 동질적이고 단결된, 그리고 의회에 책임을 지는 내각의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국민투표의 승리, 그리고 운명의 반전
그러나 공화당은 자유와 질서의 조화를 원하는 국민 여론과 달리, 이미 쟁취한 자유에 만족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은 어떠한 타협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제국 전복을 향한 결의를 재확인했다. 황실 일족인 피에르 보나파르트가 저널리스트 빅토르 누아르를 살해한 사건(1870년 1월 10일)은 혁명가들에게 오랫동안 기다려온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황제는 자신을 겨냥한 위협에 대해 1870년 5월 8일 국민투표의 압도적 승리로 화답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국을 공고히 했어야 할 이 성공은 오히려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다. 그 이면에는 외교적·군사적 영광이 자유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위험한 가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1870년 1월 2일의 의회 혁명 이후 다루 백작은 클래런던 경을 통해 사도바 전투(쾨니히그레츠) 이후 부스트 백작이 제안했던 군축 계획을 되살리려 했으나 헛수고에 그쳤다. 그는 프로이센과 황제의 측근 양쪽 모두에게서 거부를 받았다.
황후 외제니에게는 이런 말이 전해진다. "전쟁이 없다면 우리 아들은 결코 황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제국의 최후는 이미 예고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