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나폴레옹 3세 시대 프랑스 제2제국의 통치 원리와 그 진화

제1제국과는 다른 건국 원리

제2제국의 통치 메커니즘은 제1제국과 거의 흡사했지만, 그 근간을 이루는 건국 원리는 전혀 달랐다. 나폴레옹 3세가 즐겨 되풀이하던 말처럼, 제국의 사명은 국내에서는 국민을 정의로 이끌고, 대외적으로는 영구적인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보통 남성 선거권에서 권력을 직접 유래시키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망명 중에도 기존 과두정부들이 사회 문제를 외면했다고 끊임없이 비판해 온 그는, '나폴레옹 사상'에 입각한 통치 체계를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여기서 '나폴레옹 사상'이란 선출된 인민의 대표이자 민주주의의 화신인 황제의 원리,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영웅이자 혁명 유산의 수호자인 위대한 나폴레옹 1세의 계승자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원리를 뜻한다.

자유를 배제한 '사회 정의'

그러나 나폴레옹 3세는 곧 사회 정의가 곧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명분으로 삼았던 1848년의 원리들을 명목상의 겉껍데기로 전락시켰다. 의회, 보통 남성 선거권(1852년 의회가 폐지했던 것을 그가 재확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 교육, 결사 등 공공 정신을 담보하던 모든 국민적 세력은 마비 상태에 빠졌다.

입법부는 스스로 의장을 선출할 수 없었고, 예산을 항목별로 심의·표결할 수도 없었으며, 공개적인 심의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보통 남성 선거권 역시 공식 후보 제도, 언론과 집회의 자유 금지, 그리고 농촌 인구 속에 자유주의 표를 잠재우는 선거구 획정의 교묘한 조작을 통해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언론에는 신문 발행 보증금 제도와 경고 제도가 적용되었다. 경고란 당국이 특정 기사의 게재 중단을 요청하는 것으로, 이를 따르지 않으면 정간이나 폐간 처분을 받을 수 있었다. 서적 출판 역시 검열의 대상이었다.

오르시니 사건과 일반 안전법

개인 차원의 반대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 용의자 감시 제도가 설치되었다. 1858년 펠리체 오르시니가 일으킨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은 본래 순전히 이탈리아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지만, 보나파르트주의 내 보수 세력에게 체제를 한층 강경하게 만들 좋은 구실이 되었다. 에스피나스 장군이 주도하고 황제가 온건하게 지지한 일반 안전법은 재판 절차 없이 용의자를 누구든 구금, 추방 또는 유배할 수 있는 권한을 행정부에 부여했다.

공교육 역시 엄격한 감독 하에 놓였다. 리세(고등학교)에서의 철학과 역사 교육은 폐지되었고, 행정 당국의 징계 권한은 더욱 확대되었다.

침체된 정치 생활과 소수 야당

제국 초기 7년 동안 프랑스에는 사실상 정치 생활이 존재하지 않았다. 제국은 일련의 국민투표(플레비사이트)에 의해 움직였다. 1857년까지는 야당이라 할 만한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고, 1860년까지 야당은 루이 다리몽, 에밀 올리비에, 자크 에농, 쥘 파브르, 에르네스트 피카르 단 다섯 명의 의원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왕당파들 역시 침묵하며 기다릴 뿐이었다. 1853년 프로스도르프에서 정통왕조파(레지티미스트)와 오를레앙파가 동맹을 맺고 두 왕가의 폐허 위에 군주정을 재건하려 했으나 실패한 이후, 그들은 뚜렷한 활동 없이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