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두 바다가 서로를 알아보는 듯 — 수에즈 운하, 지중해와 홍해가 만난 날

두 바다가 서로를 알아보는 듯 — 수에즈 운하, 지중해와 홍해가 만난 날

레세프스(Ferdinand de Lesseps)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물이 비터레이크(Bitter Lakes) 분지로 흘러들어가는 수로를 정면으로 마주 본 곳에 단상이 세워져 있었다. 수문 여수로를 따라서는 가느다란 이동식 들보들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작업자들은 통행교 위에서 물이 지나갈 수 있도록 들보를 치울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케디브(이집트 총독)가 신호를 보내자, 중앙 경간의 첫 번째 들보가 제거되었다.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해수가 틈새로 쏟아져 나왔다. 이어 들보들이 차례로 걷히자 물줄기는 희게 부풀어 오르더니, 마침내 햇빛에 반짝이는 폭포가 되었다. 두 개, 세 개, 네 개, 스무 개의 경간이 잇달아 열리며 사방에서 물이 솟구쳤다.

500개의 들보가 모두 걷히던 순간

마침내 500개의 들보가 모두 치워졌다. 온전한 물의 장막은 굉음을 내며 짓쳐나오는 격류가 되었고, 이윽고 진흙탕 강이 되어 비터레이크 분지 한가운데까지 밀려닿았다. 지중해는 인류의 천재성이 빚어낸 가장 기적적인 위업의 완성을 돕기 위해, 서둘러 달려온 것이다.

비터레이크와 홍해 사이에는 이제 굴착해야 할 구간이 고작 5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열정을 더욱 불태웠다. 유럽인 노동자들의 눈에는 하루하루 이뤄낸 일에 대한 자부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 성취에 대한 긍지, 그리고 어제의 기록을 내일에는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야망이 그대로 읽혔다.

역사상 처음으로 행복했던 펠라힌들

펠라힌(fellah, 이집트 농민)들은 아마도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행복했다. 일한 대가로 임금을 받았고, 더 이상 굶주림과 갈증, 궁핍으로 죽는다는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카이로 철도 건설에는 약 1만 명의 펠라힌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1868년, 1천500만 입방미터의 흙과 진흙을 파내고 운반하고 다루었음에도 지협의 사망률은 1.52%에 머물렀다. 같은 시기 프랑스 국내 사망률이 2.40%에 달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였다.

레세프스는 이 뜻밖의 결과에 깊이 기뻐했다. 이 또한 그가 거둔 보상이었고, 오래도록 지속될 보상이었다. 양호한 위생 상태는 부분적으로 숙소의 위생 관리와 풍부한 식량 공급 덕분이었지만, 레세프스는 운하라는 광대한 수면이 새롭게 등장하면서 기온이 낮아지고 지협에서 전례 없던 비마저 내리게 된 것도 크게 한몫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기여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두 바다의 합류를 축하하다

8월 15일, 지중해와 홍해의 물이 비터레이크에서 합류하는 것을 축하하는 새로운 축제가 수에즈에서 열렸다. 행사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마치 수천 년 전에 이미 하나로 섞였던 두 바다가 오랜만에 재회하며 서로를 알아보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 의식에는 케디브의 공공사업상(公共事業相)인 알리 파샤 무바레크(Ali Pasha Mubarek)가 부재하는 부왕을 대신하여 참석했다. 당시 부왕은 해양 운하 개통식에 열강의 군주들을 직접 초청하기 위해 유럽을 장기 순방하는 중이었다.

운하 최초의 항해 규정

다음 날인 8월 16일, 수에즈 운하 회사 당국은 항해 규정을 공식 발표했다. 그 제1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1조 — 수에즈 해양 운하의 항해는 국적을 불문하고 모든 선박에게 허용된다. 단, 운하 수심이 8미터이므로 흘수가 7.50미터를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 증기선은 자체 프로펠러로 운하를 항해할 수 있다."

'천일야화'를 연상시키는 개통식

석 달 뒤인 1869년 11월 16일, 수에즈 운하 개통을 축하하는 성대한 행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운하의 엄숙한 개통식을 위해 레세프스는 조심스럽게 주역의 자리를 이집트의 주권자, 케디브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에게 내주었다. 영광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듯한 기분에 취한 케디브는 귀빈들을 '천일야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웅장한 무대와 눈부신 화려함으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