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 알제리 전쟁과 프랑스의 딜레마
1954년 알제리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그러나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서도 프랑스의 연이은 정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진행되어 온 탈식민지화 운동에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프랑스에 유리한 국면도 있었지만, 정치적 귀결은 전혀 달랐습니다. 알제리인들은 독립을 위해 활발히 운동을 전개했고, 프랑스 본토 여론 역시 독립이라는 개념을 점차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거리의 시위, 가짜 서류를 운반한 '서류가방 운반자(porteurs de valises)'들의 활동, 그리고 사르트르(J.-P. Sartre) 등 지식인들이 동참한 '121인 선언(Manifeste des 121)'이 그 증거입니다.
1958년 드골이 재집권하면서 어느 정도의 알제리 자치를 제안했지만, 독립 자체는 끝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드골주의 정책은 점진적으로 변화했고, 이는 '프랑스령 알제리'를 지지하는 세력의 깊은 불만을 샀습니다. 드골은 1960년 11월에는 나아가 '알제리 공화국'이라는 표현까지 언급하기에 이릅니다.
쿠데타 관련 주요 인물
-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 모리스 샬(Maurice Challe)
- 에드몽 주오(Edmond Jouhaud)
- 앙드레 젤러(André Zeller)
- 라울 살란(Raoul Salan)
쿠데타의 경과
드골의 입장 변화가 '프랑스령 알제리' 지지자들을 크게 불안하게 만들었고, FLN(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의 협상 계획은 결국 1960년 말부터 알제에서 쿠데타를 준비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61년 4월 11일, 드골은 마침내 알제리 탈식민지화 방침을 승인합니다. 그는 특히 알제리가 본국에 감당하기엔 너무 큰 비용 부담이라는 점을 근거로 들었습니다.
샬, 발뤼(Valluy), 젤러, 주오 등 장성들로 구성된 일종의 실행위원회가 작전을 지휘했습니다. 4월 21일 밤, 외인부대 제1낙하산연대가 알제를 장악하고 시청, 참모본부 등 핵심 행정 건물들을 점거했습니다. 초기 계획은 파리와 엘리제 궁에 낙하산 부대를 투하하는 것이었으나, 4월 24일 국민의회 앞에 배치된 전차의 사진이 공개되며 여론에 커다란 충격을 안겼습니다.
4월 22일, 알제 라디오는 장군들의 권력 장악을 발표했습니다. 샬은 운동의 지휘를 맡아 다른 부대들을 자신의 편으로 규합하려 했습니다. 같은 저녁, 드골은 군복 차림으로 TV 담화에 나서 반란 장군들을 강하게 규탄하고, 그들 지휘 아래 있는 병사들에게 불복종을 호소했습니다. 지지와 호응이 부족한 가운데 쿠데타는 4월 25일 저녁 무너졌고, 샬은 항복을 협상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 쿠데타의 실패로 드골은 오히려 더 강력한 위치에서 FLN과의 협상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명확한 정치적 비전의 부재 역시 알제 쿠데타 실패의 주요 요인으로 평가됩니다. 샬과 젤러는 징역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여러 차례의 사면법으로 쿠데타 가담자들은 용서받게 됩니다. 한편 살란과 주오는 지하로 숨어들어 비밀군조직(OAS)과 함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