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4월, 유주프 필수츠키(Józef Piłsudski)는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진군해 키이우에 입성했고, 이로써 소련 측과 영원히 적대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러시아에 맞서 폴란드와 동맹을 맺은 우크라이나 공화국을 세우는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반(反)볼셰비키 세력이 크림반도 기반 세력을 제외하고 모두 소멸한 상황에서 그의 희망은 좌절되었고, 전선이 위험할 만큼 길게 늘어선 폴란드군은 홀로 승세를 이어가던 붉은 군대와 맞서야 했다.
코나르미야, 국경을 넘다
1920년 5월 말, 러시아 혁명군 중 가장 정예이자 유명한 부대인 제1기병적군, 이른바 '코나르미야(Konarmiya)'가 30일간 약 1,170km를 행군한 끝에 국경을 넘어 우크라이나로 진입했다.
당시 폴란드 공군에서 복무하던 미국인 조종사는 이 장면을 두고 이렇게 회상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기병이 있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스탈린이 조직하고 부됸니가 지휘하다
1만 6,0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된 이 강력한 부대는 포 48문, 장갑열차 5편성, 장갑차 8대를 동반했다. 이 부대를 조직한 이는 야심 찬 인물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이었으며, 지휘관은 강인하고 개성 넘치는 병사이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통솔력과 남다른 체력의 소유자인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Semyon Mikhailovitch Budyonny)였다. 제12·14소련 보병군의 지원을 받은 코나르미야는 5월 26일 공격을 개시했다.
6월 5일, 소련군은 폴란드군의 후방을 돌파했고, 공포에 질린 폴란드군은 와해되었다. 베르디치우(Berdychiv)에서 그들은 부상당한 폴란드군 600명과 적십자 간호사들이 머물던 병원에 불을 질렀고, 병원은 전소되었다. 코나르미야는 이처럼 자신들의 명성을 입증했고, 7월 중순에는 모든 폴란드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했다.
북부 전선의 젊은 천재, 투하쳅스키
북쪽 전선의 붉은 군대는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투하쳅스키(Mikhail Nikolayevich Tukhachevsky)가 지휘했다. 그는 스물일곱 살의 젊은 장군으로, 스탈린에게 '내전의 악마'라 불리던 인물이었다. 1920년 7월 초, 투하쳅스키가 이끄는 5개 군은 약 16만 명(폴란드군보다 5만 명 많은 규모)에 달했으며, 대포 595문을 운용하는 3배에 달하는 포병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강력한 타격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제3기병군단(카브코르), 제10·15기병사단, 그리고 '철의 사단' 출신 아르메니아인 지휘관으로 폴란드군에게 '가이 칸'이라 불리던 가이 드미트리예비치 가이(Ghai Dmitryievitch Ghai)가 이끄는 제164소총여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르샤바를 향한 번개 같은 진격
러시아군 우익에서 기동하며 폴란드군의 측면을 끊임없이 우회 공격하던 투하쳅스키는 7월 4일부터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향으로 밀어붙였다. 14일에는 빌나(Vilna)가 함락되었고, 22일에는 그로드노(Grodno)에서 폴란드군 5,000명이 포로로 잡혔다. 붉은 군대와의 첫 교전 이후, 방어에 투입된 폴란드 전차 30대 가운데 마지막 다리를 건너 빠져나간 것은 단 두 대뿐이었다. 그 다리 아래로는 불타는 니멘(Niemen) 강이 흘렀다.
번개 같은 진격 속도는 목격자들을 경악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불과 20개월 만에 새로운 현대적 군사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몇백 미터의 진지를 확보하는 데조차 수개월의 준비와 수천 톤의 고폭 화약, 그리고 막대한 인명 손실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것은 기병이 주도한 전격전(blitzkrieg)이었다. 서부 전선에서는 사실상 무용지물로 판명되었던 무기, 바로 기병이 말이다.
연합국 사절단의 파견
영국과 프랑스의 관찰자들은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결국 이들 열강은 연합국 사절단을 폴란드에 파견했고, 사절단은 7월 25일에 도착해 최후의 지원을 어디서 받을 수 있을지 불안해하던 폴란드인들의 우려를 달래고자 했다.
이 외교·군사 사절단에서 정부 대표는 프랑스의 전(前)대사 줄 쥐스랑(Jules Jusserand)과 영국의 애버논 자작(viscount of Abernon)이었으며, 군 대표는 1918년 연합군 최고사령관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원수의 참모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막심 베이강(Maxime Weygand) 장군과, 기병 출신의 식견을 갖춘 인물인 영국의 퍼시 B. 래드클리프(Percy B. Radcliffe) 소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