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3년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맹반격에 밀려 현재의 세르비아 지역까지 후퇴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통치자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군, 이른바 '제정군'이 베오그라드를 함락시키자, 튀르크군은 도시 니시(Niš)를 주요 거점으로 삼아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니시는 견고하게 요새화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튀르크군은 흙벽에 나무 울타리와 방어용 말뚝을 보강한 진지를 만들고 그 앞에 해자를 팠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연패를 거듭한 튀르크군은 병력이 적군을 압도적으로 웃돌았음에도 야전에서 승부를 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바토치나(Batočina)에서 패배한 오스만군은 니시와 주변 언덕에 진지를 다지고 방어 태세를 갖췄습니다. 튀르크군의 정확한 병력 규모는 명확하지 않지만, 사료에 따르면 최소 4만 명, 어떤 기록은 최대 7만 명에 달한다고 전합니다. 반면 오스트리아인과 독일인으로 구성된 제정군은 단 1만 6,000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제정군에는 행운이 있었습니다. 사보이아 공자 외젠 다음가는 제국 최고의 장군,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이 지휘봉을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튀르크인의 루이(Türkenlouis)', 곧 '튀르크 포식자'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오스만군의 천적이었습니다. 루트비히는 거장 제국 장군 몬테쿠콜리(Montecuccoli) 휘하에서 소년 시절부터 튀르크군과 싸워왔으며, 빈 방어전과 이후 헝가리·세르비아에서 벌어진 반격 작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바 있습니다.
'불신자들'을 기다리며...
앞서 말했듯이 튀르크군은 니시 주변에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니샤바(Nišava) 강변에서 오늘날 니시 교외인 판텔레이(Pantelej) 마을을 거쳐 도시 북동쪽 비니크(Vinik)까지 이어지는 방어선이 그것입니다. 세라스케르(총사령관) 레제프 아랍 파샤(Recep Arap Paşa)는 진지 중앙에 위치를 잡고 이집트와 알레포 출신 부대, 예니체리, 그리고 다수의 대포를 배치했습니다. 우익에는 루멜리 총독 무스타파 주르나파 파샤의 부대가 자리했고, 좌익은 아나톨리아 총독이 이끄는 1만 5,000명의 아르나우트(알바니아) 병력이 방어했습니다. 니샤바 방어선은 타타르 기병들이 담당했습니다.
바덴 변경백의 소규모 제정군은 1689년 9월 16일 모라바 강을 건너 저항 없이 니시로 진격했습니다. 9월 22일에는 튀르크 진지의 중포 사정권 안에 있는 토폴니차(Topolnica) 마을에 도달했습니다. 다음 날 제정군이 니샤바 강변으로 접근하자 튀르크 기병이 공격해 왔으나, 제정군은 이를 격퇴했고 포로로 잡은 튀르크 병사들은 의외로 값진 정보원이 되었습니다.
포로의 진술을 바탕으로 루트비히는 전 병력을 비니크 방면으로 집중시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립니다. 이는 양 측면을 사실상 노출시키는 위험한 수였지만, 그는 튀르크군의 낮은 사기를 믿었습니다. 만약 이 기동이 성공하면 튀르크군은 퇴로가 차단된 채 완전히 섬멸될 것이었습니다.
쌍두 독수리 깃발 아래...
1689년 9월 24일, 쌍두 독수리 깃발을 휘날리고 북소리를 울리며 제정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포격과 몇 차례의 소규모 접전 후, 제정군은 용맹한 장군 귀도 슈타레베르크(Guido Starhemberg)가 지휘하는 좌익을 먼저 투입했습니다. 그곳에 배치된 마흐무트 파샤의 부대는 질서정연하게 밀려오는 적군의 모습을 견디지 못하고, 접촉하기도 전에 궤주해 버렸습니다. 결의가 남다른 2,000~3,000명의 튀르크 병사만 자리를 지켰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한편 필적할 만한 장군 아이네아스 피콜로미니(Aeneas Piccolomini)가 지휘하는 제정군 우익에서는 튀르크 기병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홀슈타인 기갑병 연대와 후사르 연대가 공격의 직격탄을 맞아 나섰습니다.
기갑병들은 튀르크 기병을 가까이 끌어들였다가 일제히 권총과 총신이 짧은 머스킷을 발사해 적 대열에 쏟아부었습니다. 막대한 손실로 대열이 흐트러진 튀르크 기병은 기독교 기병의 즉각적인 역공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했습니다. 튀르크 보병의 화망이 기병들의 진격을 저지해 준 덕분에 그들은 완전히 와해되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하이스터(Heister) 장군 휘하의 제국 보병 여단이 6개 대대를 이끌고 튀르크 진영에 돌격하여 예니체리를 분쇄했습니다. 이것이 마지막 타격이었습니다. 공황에 빠진 튀르크군은 니샤바 강의 다리를 건너려며 사방으로 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니샤바 강의 참극
강을 건너려던 병사들 가운데 최소 5,000명이 익사했습니다. 또 그만큼 많은 튀르크 병사들이 제정군의 무자비한 추격 끝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튀르크군의 사망자는 1만 명을 넘었고, 대포 30문과 금전·식량·탄약을 가득 싣은 수백 대의 마차가 승자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승자의 피해 규모도 전투의 일방적인 경과를 잘 보여줍니다. 제국군의 전사·부상자는 고작 300명에 불과했습니다... 완벽한 섬멸전이었습니다. 세라스케르 레제프 아랍 파샤 역시 이 치욕적인 패배의 대가로 목숨을 잃은 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사망 얼마 전의 바덴 변경백 루트비히 빌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