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전쟁의 발발
1950년 1월, 북한은 38도선을 넘어도 상대측의 저항 없이 진격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핵무기를 두려워했지만, 북한은 결국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합니다. 같은 날 트루먼 대통령은 적을 되돌려 보내기 위해 한국에 증원군을 파견할 계획을 세웠고, 다음 날인 6월 28일 북한군은 서울에 입성하며 미국은 즉각적인 반격에 나섭니다.
그러나 9월 15일 무렵, 북진으로 인해 국토 대부분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상황은 극도로 절박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공세를 감행하여 서울 인근 인천에 상륙 작전을 단행합니다. 서울은 곧 대한민국 수중으로 되돌아왔고, 유엔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10월 2일 북진을 개시합니다. 이에 중국은 자국의 공산 정권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동맹국 방어를 위해 인민지원군을 파견하며 전쟁에 개입하고, 소련 역시 분쟁에 가담합니다. 전쟁은 다시 38선 일대에서 지속되었습니다.
전쟁의 중심에 선 유엔
한편 유엔(UN)은 어떤 방식으로든 평화를 확립하려 노력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 등 회원국들의 요청에 따라 유엔은 분쟁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북한이 침공당하는 상황을 목격한 중국은 이를 미국에 맡기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고, 결국 중국과 유엔 간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서울은 다시 한번 북한군에게 함락됩니다. 트루먼은 더 이상 한반도 통일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의 조기 종결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서울을 다시 대한민국의 손에 넣어준 것은 유엔군이었습니다.
휴전 협정 체결
휴전 협정 체결까지는 약 2년간의 추가 협상이 필요했으며,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사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상당수가 민간인이었습니다. 이 전쟁은 핵 시대 최초의 분쟁이자, 유럽의 철의 장막처럼 구축된 미국식 반공주의의 방파제를 상징하는 전쟁이었습니다.
북에서 남으로, 남에서 북으로 이어진 수차례의 침공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마침내 조인되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이후 트루먼은 한반도 통일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았고, 공산주의로 남게 된 북부와의 싸움을 접어야 했습니다. 한국은 두 개의 지역으로 분단되었는데, 이는 1975년 4월 30일 완전히 공산화된 채 통일을 이룬 베트남과는 대조적인 결과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레닌이 이룩한 사업은 저물었지만, 북한에는 여전히 냉전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와 중국의 지원을 받는 공산주의 국가로 분단된 한반도는 철의 장막이 남긴 상처를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