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베지 구출 작전(Kolwezi Rescue)은 1978년 5월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벌어진 프랑스 외인부대의 공수 작전입니다. 카탕가 반군이 광산 도시 콜베지에서 억류한 유럽인 인질들을 구출하기 위해 수행된 이 작전은 군사적 인명 손실을 상대적으로 적게 내면서 인질 전원을 석방하는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도시의 위치
콜베지는 자이르 남동부, 전략적 원자재가 풍부한 샤바(현 카탕가) 광산 지역의 한가운데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1978년 당시 약 10만 명이 거주했으며, 면적은 약 40㎢에 달하고 언덕을 경계로 구역이 뚜렷하게 나뉘어 있었습니다. 루붐바시와 딜롤로를 잇는 도로와 철도라는 요충 교통로 위에 자리했고, 시내 중심에서 6km 떨어진 곳에 비행장이 있었습니다.
반군의 인질 확보
1978년 3월, 알제리·앙골라와 콩고 해방 국민전선(FNLC) 활동가들 간의 회담 이후, 자이르 정보기관은 전략 원자재가 풍부한 샤바 지역에서 불안정화 작전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한 정보를 입수합니다. 소련은 이미 수개월째 자유 시장에서 코발트를 대량 매입하고 있었지만, 서구 정보기관들은 이 경제적 신호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작전을 실행할 인물은 나다니엘 음붐바(Nathaniel Mbumba)였고, 그의 민병대 '호랑이 부대(Tigers)'는 쿠바와 동독 장교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1978년 5월 11일, 앙골라에서 온 무장이 잘 갖춰진 약 3,000~4,000명의 카탕가 반군이 제2쿠바 사단의 수송을 받아 중립국 잠비아를 거쳐 침입했습니다. 반군은 약 3,000명의 유럽인을 인질로 잡고 만행을 저질렀으며, 자이르군 소속 파나르 AML 60 장갑차 소대마저 반군에 합류했습니다.
추산에 따르면 90명에서 280명 사이의 유럽인이 살해되었습니다. 5월 15일부터 수백 명의 반군이 탈취한 차량으로 도시를 떠났고, 약 500명만이 쿠바인들의 감독 아래 잔류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교외 지역인 마니카(Manika) 마을에 머물렀습니다.
모부투 대통령은 결국 미국, 프랑스, 벨기에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프랑스-벨기에의 대응
작전 준비
프랑스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5월 16일 새벽 0시 45분, 필리프 르륄랭(Philippe Erulin) 대령이 지휘하는 제2외인공수연대(2e REP)에 출동 대기를 명령했습니다. 벨기에와 프랑스 군 당국은 독일에서 회동해 공동 작전을 조율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벨기에는 순수한 인도적 목적으로 별도의 공수 작전을 펼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언론 보도와 항공기 이동 소식으로 작전 성패를 좌우할 기습 요소가 상실될 우려가 커졌습니다. 5월 18일 초오후, 벨기에 공군(제15비행단)의 C-130 수송기들이 멜스브룩 군용공항을 이륙해 킨샤사를 경유해 카미나로 향했습니다. 프랑스는 벨기에 항공기의 영공 통과를 거부했고, 벨기에 측은 아프리카 서쪽으로 우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벨기에 C-130들은 구(舊) 프랑스 식민지에서 급유 문제를 겪은 끝에 5월 19일 오후에야 카미나에 도착했습니다. 파리는 벨기에 작전의 발목을 잡은 셈입니다.
5월 17일 낮, 외인부대원들은 민간 항공사 UTA 소속 DC-8기 4대에 분승해 솔렌자라에서 킨샤사로 이동했고, 장비와 무기를 실은 보잉 707이 뒤따랐습니다. 부대는 다음 날 밤 11시 15분부터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킨샤사 군용공항에서는 미군 낙하산 인수 등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고, 각 중대는 18일 밤부터 19일 새벽까지 빠른 교육을 받았습니다. 브리핑 역시 밤에 진행되어 프랑스 대사관 무관 그라(Gras) 대령이 설계한 작전 계획의 세부 사항이 확정되었습니다. 5월 19일 오전 11시, 프랑스 공군 트란살(Transall) 2대와 자이르 소속 C-130 허큘리스 4대가 이륙해 첫 강하 부대를 수송했고, 같은 시각 벨기에 공수부대원들은 카미나에 집결하고 있었습니다.
오퍼레이션 스킵잭(Operation Skipjack)
5월 19일 오후 2시 30분, 지휘부(PC)와 3개 중대로 구성된 405명이 고도 250m에서 옛 경마장 상공에 강하했습니다. 강하 직후 소화기 사격으로 6명이 부상당했고, 한 병사는 부대에서 멀리 착륙한 끝 낙하산을 벗지 못한 채 거리 한복판에서 살해당하고 시신이 훼손되었습니다.
즉각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이를 통해 인질로 잡혔거나 숨어 있던 유럽인들이 구출되었습니다. 오후 3시경 AML 장갑차를 포함한 반군 종대가 역 근처에서 로켓 발사기 사격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신속한 돌파 작전을 통해 모든 반군 집단이 소탕되었습니다.
저녁 6시 해 질 녘, 도시는 외인부대의 통제 하에 들어왔습니다. 부대들은 교차로마다 진지를 구축했습니다. 밤사이 반군은 도심 곳곳으로 잠입해 역공을 시도했으나 외인부대의 매복에 걸려 저지되었습니다.
정오, 첫 번째 인질들이 활주로를 통해 공중 후송되었습니다.
5월 20일 오전 6시 30분경 벨기에 공수부대원들이 콜베지에 착륙해 외인부대에 의해 일시 저지되었으나, 곧 프랑스군의 검문선을 통과해 시내에 진입했습니다. 그들은 P2 지역의 학살 현장을 발견했습니다. 벨기에군은 한 달 이상 카탕가에 머무르며 콜베지 지역 주민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모로코군과 협력해 질서 유지를 담당했습니다.
19일 밤부터 20일까지 새로운 전투가 이어졌습니다. 원래 18일 밤으로 예정됐던 두 번째 강하 부대 250명은 밤이 끝날 무렵인 오전 6시 30분에야 투하되었습니다. 이들은 도시 동쪽에 강하해 반군의 배후를 찔렀고, 오전 중에 해당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20일 오후에는 광산 도시 메탈-샤바(Metal-Shaba)도 제2외인공수연대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200명의 반군은 철수를 강요당했지만, 퇴각하며 외인부대 하사 한 명을 살해했습니다.
작전의 과감함과 신속한 실행은 기습 효과를 가져왔고, 외인부대는 그 여세를 몰아 도심을 장악했습니다. 단 이틀 만에 도시를 완전히 통제하고 2,800명의 자국민을 구출해 5월 21일 후송했습니다.
교체 및 철수
이 지역은 모로코가 주도하고 세네갈, 토고, 가봉이 참여한 아프리카 연합군이 교체 투입될 때까지 공수부대의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전투 결과와 평가
약 250명의 반군이 사망했고, 외인부대원 5명, 벨기에 공수부대원 1명, 모로코 특전대원 1명이 전사했으며 20여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외인부대는 소화기 1,000정, 야포 4문, 박격포 15문, 로켓 발사기 21기를 노획하고 AML 장갑차 2대를 파괴했습니다.
이 불안정화 시도로 약 700명의 아프리카 민간인과 170명의 유럽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랑스군이 FR-F1 저격소총을 실전에 사용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이 구출 작전은 정찰과 정보 수집, 신속한 작전 설계와 실행, 물자 지원 등 철저히 준비된 작전에서 기습 효과가 뒷받침될 때 경장비 공수부대가 얼마나 강력한 전력이 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평가됩니다.
참고 자료
피에르 세르장(Pierre Sergent), 『외인부대, 콜베지에 강하하다(La Légion saute sur Kolwezi)』, Presses de la Cité, 1978
가우세르(Gaussères) 장군, 「콜베지의 교훈 – 1978년 5월」, Cahiers du Retex 제12호, 프랑스 국방부 전력 운용 교리센터 발행
Front Line Magazine 제1호, 2006년 9월, "1978, REP는 콜베지에 강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