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금이 가기 시작한 1950년대 말
건물에 첫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경제 침체로 실업자가 크게 늘었고, 고위 직업으로의 진출이 막힌 흑인들 사이에는 불만이 갈수록 커져갔다. 이웃 나라들의 영향 또한 서서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런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투자는 줄어들고 자본은 국외로 빠져나갔으며 실업은 더욱 심화되었다. 동시에 민족 간 적대감이 격해졌는데, 특히 채용 축소로 치열한 생존 경쟁이 벌어지던 도시에서 두드러졌다.
그 결과 1959년 1월 레오폴드빌(현 킨샤사)에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노동자와 실업자들은 수십 년간 쌓여 온 원한을 약탈과 방화로 풀어낸 것이다.
서둘러진 독립, 그리고 엘리트의 부재
이 사태에 놀란 벨기에는 정책을 완전히 바꿔 신속한 독립 부여에 동의했다. 그러나 벨기에는 곧 딜레마에 직면했다. 콩고는 다른 서아프리카 국가들과 달리 권력을 넘겨줄 만큼 경험이 쌓인 엘리트가 없었고, 나라를 하나로 묶어 줄 정치적 전통도 존재하지 않았다. 촉박한 상황 속에서 벨기에는 이 공백을 메우려 애썼다. 지도자들이 재빨리 양성되었고, 정치 활동이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루뭄바와 정치 세력의 판도
이러한 환경에서 극단적인 운동이 등장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식민 지배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인내하는 편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할 만한 엘리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콩고민족운동(MNC)이 정치 무대를 장악하게 된다. 이 운동은 중부 지역 농민, 도시 프롤레타리아트, 남부의 여러 부족 집단 사이의 상당히 취약한 동맹 위에 세워졌다.
지도자는 파트리스 루뭄바였다. 스탠리빌(현 키상가니)에서 삶의 일부를 보낸 전직 우체국 직원으로, 그의 격렬한 성격은 모든 콩고인의 좌절과 열망이 응축된 것이었다. MNC에 대한 유일한 꾸준한 반대세력은 유럽인들의 확고한 지원을 받는 모이스 촘베가 이끄는 카탕가의 코나카트당과, 조제프 카사부부가 이끄는 레오폴드빌 지역의 아바코당이었다.
1960년 6월 30일, 독립
매우 격렬했던 선거와 길고 지루한 협상 끝에 벨기에는 마침내 1960년 6월 30일, 루뭄바가 총리를 맡고 카사부부가 대통령을 맡는 연립정부에 권력을 이양했다. 그러나 아프리카화에는 시간이 너무나 촉박했다. 행정부와 군의 고위 간부직은 여전히 벨기에인의 손에 있었다.
독립과 함께 콩고는 불안정성을 안고 출발했다. 많은 관찰자들에게 이 나라는 불씨 하나만 있으면 불길이 타오를 듯 보였다.
군 반란과 카탕가의 분리 독립
결국 폭발의 도화선이 된 것은 군대 내 반란이었다. 레오폴드빌과 티스빌에서, 상관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아프리카화의 전망이 전무하다고 판단한 콩고인 군인들은 장교들을 가두고 과격하게 행동했다. 반란은 빠르게 다른 부대로 번졌고, 벨기에인 주민들은 나라를 떠나기 시작했다.
벨기에는 군대를 파견했고, 강력한 광산 회사 유니옹 미니에르를 비롯한 벨기에 기업들의 지원을 받은 모이스 촘베는 카탕가의 독립을 선포했다. 나라가 혼돈에 빠지고 벨기에군이 계속 유입되며 가장 부유한 주마저 분리 독립하는 상황을 목격한 루뭄바와 카사부부는 유엔에 절박한 호소를 보냈다.
유엔의 개입과 갈등의 시작
독립 선언과 함께 콩고는 자본을 지키려는 외국 기업들뿐 아니라 아프리카·아시아 국가들과 강대국들까지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무대가 되었다.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과 소련의 동의 하에,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의 지휘 아래 콩고로의 파병을 승인했다.
처음에 유엔과 콩고 정부는 효과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관계는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카탕가의 부가 온순한 촘베의 손에 넘어가기를 바라는 일부 서구 기업 집단의 압력을 받은 함마르셸드가, 유엔군이 카탕가에 대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