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움바의 선택: 굴복이냐, 도전이냐
파트리스 룸움바에게 앞길은 분명하게 갈렸습니다. 외부의 압력을 견디며 유럽 열강이 자국의 미래를 결정하도록 방임하거나, 아니면 콩고의 독립을 한 번 더 확고히 천명하는 것. 그의 정치적 이력과 불굴의 투쟁 기질은 자연스럽게 후자로 이끌었습니다.
1960년 8월, 룸움바는 소련 군사 고문관 일부의 지원을 받는 콩고군을 동원해 분리주의 세력이 장악한 카탕가에 대한 직접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행보는 치밀하게 설계된 작전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도전장에 가까웠습니다. 맞서야 할 세력은 너무나 강대했고, 결국 작전은 참패로 끝나며 그 자신의 몰락을 불러왔습니다.
축출, 그리고 비극적 최후
1960년 9월 5일, 미국과 벨기에의 지원을 등에 업은 대통령 조제프 카사부부가 룸움바를 총리직에서 축출합니다. 이어 대중 봉기를 우려한 육군의 조제프 모부투 대령이 9월 14일 권력을 장악하며 정국은 더욱 혼란스러워졌습니다.
룸움바는 처음에 가택 연금되었다가 이윽고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1961년 1월 그는 카탕가로 강제 이송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카탕가 분리주의 정권의 묵인과 공모 아래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순교자가 되다: 죽음이 남긴 것
겨우 석 달 남짓 집권했음에도 룸움바는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그의 죽음은 전 세계 곳곳에서 폭동과 항의 시위를 촉발했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격분한 시위대가 벨기에 대사관을 불태웠고, 그의 지지자들이 대거 모여 있던 콩고 동부의 스탠리빌에서는 전 부총리 앙투안 기젱가가 새 정부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1961년 초의 콩고는 세 개의 경쟁 정권이 난립한 채 완전한 분열 직전까지 내몰린 듯 보였습니다.
분열의 위기에서 통합으로
그러나 룸움바가 죽자 상황은 반전됩니다. 콩고 안팎의 주요 세력들은 오히려 국가의 통합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스탠리빌과 수도 레오폴드빌의 정치인들 사이에서 길고 긴 협상이 이어졌고, 마침내 합의에 도달합니다. 1961년 8월,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온건파 정치인 시릴 아울라를 총리로, 기젱가를 부총리로 하는 새 중앙정부가 출범하면서 콩고는 와해의 늪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