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이 감돌던 랑손
한 개 대대는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고, 클레르 강(Claire River) 부대에 소속된 제3/10 R.M.I.G. 부대는 록빈(Loc Binh) 방면으로 기동 훈련을 나간 상태였다. 당시 랑손에는 약 6,000~7,000명의 일본군이 집결해 있었으며, 그중 약 1,000명은 우리 부대 내부에 잠입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때문에 수비대는 각별한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3월 7일 밤부터 8일 새벽까지 첫 번째 경보가 발령되었다. 사바티에(Sabattier) 장군이 경보를 발령하기 전이었다. 카오방(Cao Bang)으로 이동 예정이던 한 개 대대의 출발은 취소되었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경보 해제가 명령되었지만, 록빈에서 훈련 중이던 2개 대대는 긴급 소환되었다.
그러나 8일 밤부터 9일 새벽까지 통킹(Tonkin) 사단을 통해 다시 경보가 발령되면서 병력들은 전투 위치에 재배치되었다. 그럼에도 또다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다음 날 아침 경보는 해제되었다.
만찬 초청, 그리고 배신
이 무렵 일부 현지인들의 소문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공격이 임박했다고 믿지 않았다. 특히 방어 책임자인 로베르(Robert) 대령과 주민(레지당) 오펠(Auphelle) 등 여러 군·민간 인사들이 일본 측으로부터 저녁 8시 만찬에 초대받으면서 더욱 그렇았다. 로베르 대령은 초청을 수락하기 전에 하노이 총사령부 참모부의 승인까지 받아낸 상태였다.
그러나 3월 9일 밤 8시 30분경, 격렬한 포격과 함께 일본군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다. 단 몇 분 만에 마이파(Maipha) 캠프(제10 R.M.I.C. 및 제4/3 R.T.T.)는 무자비한 포격 끝에 함락되었다. 극소수 병력만이 일본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클레르 강 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랑손 북쪽 1km 지점의 끼루아(Ky Lua) 캠프 역시 기습으로 무력화되었다.
저항과 함락
밤 10시경에는 G.I. 캠프마저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인도차이나 위병으로 위장한 채 몰래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한편 요새들은 끝까지 버텼고, 반메오(Van Meo)와 나무(Na Mou)의 보조 진지들도 공격자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성채(시타델)는 오랫동안 저항했으며 밤사이 역공까지 감행했다. 모든 수비병들은 새벽과 함께 미군 전투기가 나타나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악천후로 인해 미 제14항공군(14th U.S.A.F.)은 출격할 수 없었다. 오히려 오후 2시경 일본군 항공기가 '네그리에(Négrier)' 요새를 공습했고, 이 요새는 3월 10일 해 질 녘 마침내 함락되었다. 나머지 저항 거점들도 압도당한 채 낮 동안 차례로 무너져 내렸다. 격분한 일본군은 전투가 끝난 후 부상자를 포함한 약 300명의 포로를 처형했다.
잘린 머리, 처형된 지휘관들
밤사이 포로로 잡힌 르모니에(Lemonnier) 장군은 휴전 명령을 내리기를 거부한 죄로 목이 잘렸다. 만찬에 초대되었다가 체포된 로베르 대령과 오펠 주민 역시 전투 중지 명령을 거부하다가 총살되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파카르(Paccard) 경시총감도 있었다. 또한 동양인 얼굴 때문에 일본군에게 살려두었던 혼혈(유라시안) 병사 하나는 자신이 프랑스인임을 큰 소리로 외치며, 동료들과 함께 '브리에르 드 리슬(Brière-de-l'Isle)' 요새에서 순국했다.
딘랍(Dinh Lap)은 11일 공격을 받아 그날 안에 함락되었다. 록빈, 응아투옥(Nha Thuoc), 찌마(Chi Ma) 거점의 병력들은 3월 13일 중국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