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달라진 적, 잔혹한 전장
프랑스군은 그동안 켐페타이(헌병대)를 제외하면, 전투 중과 후에도 기본적인 인도주의 규칙을 지키는 강인하고 교활한 적과 맞서왔다. 하지만 이제는 똑같이 결연하고 교활하면서도, 문명국이라 부를 자격이 없는 잔혹성을 드러내는 적과 상대해야 했다. 부상자와 포로 처형, 민간인 남녀노소 암살, 강간, 약탈이 자행되었다.
국경 방어선의 구조적 한계
라오까이(Lao Kay)에서 몽까이(Mongcai)까지 국경 지대는 여러 군정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라오까이, 하장(Ha Giang), 까오방(Cao Bang), 몽까이 등 주요 거점엔 검문소가 설치되었으나, 병력은 빈약했다. 이곳들은 본래 근대군의 침공을 막기 위함이 아니라, 해적과 밀수꾼을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랑선(Lang Son)과 동당(Dong Dang)을 제외하면 방어적 가치는 미미했고, 지휘관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최근 몇 년간 주요 도시의 저항 능력을 키우려는 노력은 있었다.
제2군정구역: 라오까이·하장·까오방·몽까이의 붕괴
라오까이와 하장의 기습
3월 9~10일 밤, 라오까이와 하장 주둔지가 기습당했다. 라오까이에서는 밤새 전투가 이어졌고, 최후의 거점 콕레우(Coc Leu) 요새가 3월 10일 저녁 민간인 인질 학살을 막기 위해 항복할 때까지 버텼다. 하장은 하룻밤 전투 후 함락되었고, 부상자를 포함한 일부 수비대가 처형당했다. 일본군이 풀어주거나 탈출한 티라이유(현지인 소총수)들은 피신처가 된 초소에서 베트남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
까오방과 몽까이
까오방은 두 개 중대가 3월 13일까지 저항했다. 몽까이(제1 티라이유 대대)는 3월 21일, 싸울 보급품이 바닥나 철수했다.
거짓 정보와 연쇄적 동요
수도를 장악한 일본군은 라오까이와 하장에서 "총독이 전면 휴전 명령을 내렸다. 계속 저항하는 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는 거짓 정보를 퍼뜨렸다. 이미 일부 초소가 전투 불능 판정으로 미리 파괴·포기된 상황에서, 이 거짓말은 베트남인 병사들의 동요를 가속화했다.
후퇴와 재편
버려진 초소들(반피에트, 파카, 옌빈사, 빈투이, 박꽝)의 병력과 물자는 무옹쿠옹(Muong Khuong)과 파롱(Pha Long), 그리고 호앙수피(Hoang Su Phi) 쪽으로 집결했다. 프랑스 군사대표단(M.M.F.) 마페우(Mapeu) 주재 보르그(Borg) 대위와 쿤밍(Kunming)의 생트니(Sainteny) 사령관 임무와 연락을 취했다.
탈영과 부대 재편성
베트남인 병사들의 대규모 탈영으로 장교들은 매일 고립된 생존자들을 모아 부대를 재편해야 했다. 파롱은 3월 25일 일본군의 첫 공격을 격퇴했고, 29일 호피차이(Ho Pi Chay)에서도 일본군을 저지했다. 하지만 28일, 신만(Xin Man) 기습을 위해 병력이 빠진 틈을 타 파롱이 함락되었다. 3월 말에는 무옹쿠옹도 포기해야 했다.
한 달간의 잔존 저항과 중국 국경에서의 종언
3월 중순 포방(Pho Bang), 동반(Dong Van), 콕판(Coc Pan), 바오락(Bao Lac) 초소에서 철수한 병력까지 합류해, 클라인(Klein) 소령 지휘하에 비교적 큰 부대(백인 중대 1개, 토착인 중대 4개, 산악인 중대 4개)가 편성되었다. 이 부대는 4월 25일부터 5월 2일까지 치열한 전투 끝에 만메이(Man Mei) 초소를 탈환했으나, 일본군의 거센 공세와 중국 국경 당국의 결정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5월 초 중국 당국은 "자신들의 전구도 아닌 곳에서 싸우는" 프랑스 부대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며 강경해졌다.
까오방 구역: 르을(Reul) 소령의 기동전
까오방 구역 사령관은 일본 기습을 예상하고 중칸푸(Trung Khanh Phu)로 미리 후퇴, 철수 부대를 지휘하며 적을 기동시켰다. 응우옌빈(Nguyen Binh)은 3월 9~10일 밤 함락되었으나, 증원된 타룽(Ta Lung)은 14일까지 버텼다. 르을 소령은 타룽, 꽝위엔(Quang Uyen), 동케(Dong Khe), 하랑(Ha Lang), 속장(Soc Giang), 짜린(Tra Linh) 초소 병력으로 포페오(Po Peo)를 3월 25일까지 지켰다. 포페오에서 속장 쪽으로 정찰을 나가 응우옌빈과 짜린 인근에 분견대를 배치했으며, 까오방에 3,000명의 일본군이 주둔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행했다. 쯩치(Tsing Tsi)의 레볼(Revol) 소령(M.M.F.)과 연락을 통해 연합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음을 확인한 르을 소령은, 무기·탄약 부족으로 5월 상순 중국으로 철수했다.
제1군정구역: 하꺼이·띠엔옌·몽까이의 전투와 철수
하꺼이의 비극
3월 9~10일 밤, 하꺼이(Ha Coi)와 띠엔옌(Tien Yen) 주둔지가 공격받았다. 띠엔옌에서는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고 격퇴되었다. 하꺼이에서는 일본군이 연회(아페리티프)에 초대한 뒤 레니에(Reynier) 대위를 납치했다. 대위는 항복하라는 일본군 요구에 자신의 부관에게 항복하지 말고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3월 11일 초소 함락 후 남은 수비대 앞에서 잔혹하게 처형당했다.
띠엔옌의 분전과 후퇴
해군과 항공대 병력으로 증원된 띠엔옌은 여러 차례 반격으로 3월 14일까지 버텼다. 하지만 탄약이 다 떨어졌고, 르콕(Lecocq) 중령의 공수 보급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3월 14~15일 밤 빈리우(Binh Lieu)로 후퇴했다.
르콕 중령 전사와 몽까이 철수
르콕 중령은 13일, 일본군 수중인 하꺼이를 포위한 채 공격하다 전사했다. 15일 담하(Dam Ha) 함락 후 일본군은 16일 하꺼이 주둔군에 보급과 증원을 완료했다. 몽까이로 집결한 프랑스군은 19일부터 맹공을 받았다. 거듭된 보급 요청은 묵살되었고, 21일 중국으로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앞서 전투에서 잘 싸웠던 베트남인 병사들이 이때 대거 탈영했다. 캉트리(Commentry) 대위 휘하로 잔여 병력이 재편되었고, 순찰정 프레줄(Frezouls), 크레작(Crayssac), 오다시외즈(Audacieuse)호가 제1군정구역 영해에서 잠시 더 프랑스 국기를 지켰다.
랑선: 국방 체계의 핵심 거점
광시( Kouang-Si)와 통킹(Tonkin)을 잇는 고전적 요로인 랑선은 국경 방어 체계의 핵심 거점이었다. 1940년 9월 전투 후 요새 체계가 재검토·현대화되었다. "브리에르 드 릴(Brière-de-l'Isle)", "네그리에(Négrier)", "갈리니(Gallieni)" 요새와 끼리우(Ky Lua) 소요새에 다량의 탄약과 식량이 비축되었고, 5개 대대와 2개 포병 그룹으로 구성된 든든한 수비대는 높은 사기를 유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