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지원군마저 전멸하다 — R.C.4 참사의 최후

1950년 가을, 인도차이나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제4국도(R.C.4)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월맹군(베트민)의 포위망 속에서 프랑스군은 하나씩, 그러나 확실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최후의 학살, 그리고 붕괴

최후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외인부대 낙하산대대(B.E.P.)의 지휘를 이어받은 장피에르(Jeanpierre)는 생존자를 헤아렸다. 불과 130명, 한 개 중대 규모였다. 그는 이들을 장교가 각각 인솔하는 다섯 개 조로 나눈 뒤, 땋케(That Khé)로 이어지는 꽝리에트(Quang Liet) 계곡을 따라 이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행운은 이어지지 않았다. 곧이어 벌어진 매복 공격이 B.E.P.의 마지막 잔존 병력을 덮쳤고, 대대는 완전히 붕괴하고 말았다. 죽음이 임박한 세그레탱(Segrétain)은 자신의 요청대로 현장에 남겨졌다. 밤새 이동을 계속한 장피에르를 포함한 단 23명만이 608고지에 도달했고, 이틀 뒤인 10월 10일 화요일 — 땋케가 철수하기로 예정된 바로 그날 — 에야 겨우 땋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동안 까오방에서 남하하던 샤르통(Charton) 대령의 부대는 이미 궤멸당했고, 그 자신도 포로로 잡힌 상태였다. 이어 르파주(Lepage) 중령의 차례가 왔다. 두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1954년까지 이어질 길고 참혹한 포로 생활이었다.

완전히 닫힌 함정

10월 9일과 10일, 이틀 사이에 월맹군은 땋케로 몰려드는 지원 부대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다. 샤르통과 르파주 부대의 잔존 병력과의 합류를 시도하던 카조(Cazaux) 대위의 제3식민지낙하산특공단(G.C.C.P.) — 지원을 위해 땋케에 강하한 부대였다 — 과 제1외인부대낙하산대대의 행군 중대는 모두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함정은 완전히 닫혔다.

R.C.4 참사의 대가

R.C.4 참사에 투입된 약 5,000명의 병사 가운데 살아서 빠져나온 것은 장교 39명을 포함해 1,840명에 불과했다. 대가는 너무나 컸고, 그 충격은 프랑스군 내부에 공포를 퍼뜨렸다. 똥께(Dong Khé)는 월맹군에게 함락되었고, 까오방(Cao Bang)은 처참한 혼란 속에 버려졌으며, 프랑스군 최고사령부는 완전히 압도당한 상태였다.

10월 10일, 제3G.C.C.P.가 궤멸당하는 가운데 땋케 역시 철수했다. 이로써 프랑스군의 '대철수'가 시작되었다. 국경 지역의 요충지들이 차례로 손을 놓이면서 전쟁의 주도권은 월맹군 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철수가 끝난 뒤에야 땋케에 도착하는 병사들도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쳤지만, 드디어 프랑스인들을 만나게 되리라 기뻐 절규하던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월맹군과 마주쳤고, 결국 포로 수용소로 끌려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