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칠레 군사 독재: 1973년 쿠데타에서 피노체트 시대의 끝까지

1973년 9월 11일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대통령에 대한 군사 쿠데타로 시작된 칠레의 군사 독재는 수천 명의 칠레 국민들을 고문하고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칠레 군사 독재: 1973년 쿠데타에서 피노체트 시대의 끝까지

칠레 군사 독재는 1973년 9월 11일 당시 집권하던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맞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로 시작되었습니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장군이 이끈 새 정권은 1990년까지 지속되었으며, 철저한 탄압과 언론 통제가 특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3,00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약 4만 명이 고문을 당했으며, 수천 명의 칠레 국민들이 망명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살바도르 아옌데에 대한 쿠데타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36.63%의 득표율로 칠레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사회주의 성향의 정치인으로, '인민단결(Unidad Popular)'이라 불리는 칠레 좌파 정당 연합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심각한 경제 위기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 속에서 운영되어야 했습니다.

집권 이후 아옌데 대통령은 경제 사회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습니다. 농지개혁 프로그램이 시행되었고, 은행과 구리 광산, 그리고 국내에 진출해 있던 수많은 대기업들이 국유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자국 내 경제적 이익이 위태로워진 다국적 기업들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동시에 아옌데의 사회주의 노선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사회주의 확산을 용납하지 않던 미국의 강한 반감을 샀습니다. 특히 쿠바 사례 이후 미국의 이러한 입장은 더욱 강경해졌습니다.

이후 아옌데 정부는 정치적 약화를 노리는 국내외 세력들의 방해 공작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은 칠레 경제에 제재를 가했고, 중앙정보국(CIA)을 통해 아옌데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지원하며 정권을 소모시키려 했습니다.

이러한 반대 세력 중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극우 성향의 '조국과 자유 국민전선(Frente Nacionalista Patria y Libertad)'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아옌데 정부에 대한 테러 행위를 감행했습니다. 또한 CIA는 1972년 트럭 운전사 파업 등 칠레 경제의 핵심 분야에서 발생한 내부 파업에 자금을 지원하며 칠레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제재와 자금 지원에 따른 내부 소요는 결국 칠레 경제 전반의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1973년에는 인플레이션이 400%에 육박했고 국내총생산(GDP)도 급락했습니다. 마침내 아옌데에 대한 음모의 마지막 단계로, 정권 전복을 모의하는 군사정부(Junta)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음모의 핵심 인물은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이었습니다. 그는 1973년 8월부터 칠레 육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었는데, 흥미롭게도 이 직위는 아옌데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것이었습니다. 피노체트가 가담하면서 쿠데타는 9월 11일로 계획되었습니다. 쿠데타 당일, 라 모네다(La Moneda) 대통령궁은 전투기의 폭격과 무장 병력의 지상 공격을 받았습니다. 아옌데 대통령은 공습 당시 궁 안에 있었으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오랫동안 그는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로써 쿠데타를 주도한 군사정부가 칠레의 권력을 장악했고, 1990년까지 이어지는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칠레의 군사 쿠데타는 좌파 정치 세력의 성장을 막기 위해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 독재가 들어선 미주 지역의 흐름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군사 독재도 같은 맥락에서 등장한 사례입니다.

칠레 군사 독재 정권의 실상

아옌데 대통령의 실각과 죽음 이후, 군사정부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칠레의 지도자로 선임했습니다. 피노체트는 칠레 독재 기간 전체, 즉 1990년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습니다. 이 시기는 탄압과 언론 통제로 얼룩졌으며, 그 결과 3,065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고 40,018명이 고문을 당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학살과 고문의 희생자들 외에도, 수천 명의 칠레 국민들이 탄압을 피해 해외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부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거나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입장을 밝힌 사람들은 가차없이 체포되었습니다. 정권 초기에는 칠레 국립경기장이 감옥으로 활용되어 탄압의 희생자 수천 명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 독재 정권은 아옌데가 추진했던 사회화 프로젝트를 모두 철폐하고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이 정책은 미국 시카고에서 유학한 젊은 칠레 경제학자들, 이른바 '시카고 보이즈(Chicago Boys)'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정부 지출 축소와 사회복지 삭감이 대표적인 조치였으며, 이는 칠레의 사회 불평등 심화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1980년 국민투표 이후 새 헌법이 승인되어 피노체트는 1988년까지 집권할 수 있었고, 그해 새로운 신임 투표가 예정되었습니다. 그러나 1988년에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국민의 56%가 그의 집권 연장을 거부하면서 독재 정권의 막이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국민투표 패배 이후 피노체트 정부는 민주주의로의 이행 과정을 시작했습니다. 피노체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종신 상원의원 자리를 유지했으며, 파트리시오 아일윈(Patrício Aylwin)이 칠레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민주화 이후 정권 시절 저질러진 범죄들에 대한 수많은 고발과 재판이 이루어졌습니다.

피노체트는 건강 악화로 1998년까지 종신 상원의원으로 재직하다 물러났습니다. 이후 그는 인권 침해와 비밀 계좌로의 자금 유출 등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지만, 정신 쇠약 진단서를 제출하여 끝내 재판대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피노체트는 2006년 12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글쓴이: 다니엘 네베스(Daniel Neves)
역사학 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