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2일, 두 개의 역사적 무대

1945년 9월 2일, 일본이 도쿄만의 미주리호에서 정식으로 항복한 바로 그날, 하노이에서는 호치민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르클레르 장군이 프랑스를 대표하여 미주리호 갑판에 섰다면, 같은 시각 하노이에서는 역사의 흐름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굽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북위 16도선 이북에서 프랑스는 완전히 외면당했습니다. 일본군 현지 항복 의식에서 프랑스 대표에게 배정된 자리는 지극히 서열 낮은 것이었고, 우리 대표단은 차라리 참석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할 지경이었습니다.
아직 구원될 수 있었던 기회
그러나 모든 것은 아직 되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많은 폐허와 유혈, 쓰디쓴 회한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북부 인도차이나에서도 남부에서처럼 자유로운 활동과 동맹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고, 옛 보호민과의 화해와 상호 이해를 향한 진심 어린 노력이 의심과 배척이 아니라 성원으로 받아들여졌다면,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양측이 수용할 만한 공존의 틀이 마련되었을 것입니다.
호치민이 7월에 쿤밍에서 저에게 보낸 5개항 메시지는 바로 그러한 의지를 담고 있는 듯했으며,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온갖 우여곡절 끝에 7개월 뒤인 1946년 3월 6일 체결된 협정이 이를 입증해 줍니다.
코친차이나, 남부에서는 달랐던 상황
북부와 남부 베트남을 비교하는 이유는 코친차이나의 상황이 실제로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일본군 무장 해제를 담당했던 영국 동맹군은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했습니다. 영국군은 일본군 참모부에 질서 유지 책임을 명확히 부과하고, 자신들이 도착하기 며칠 전 이미 프랑스인 거주민 사이에 희생자를 내던 소요 사태를 종식시켰습니다.
9월 4일부터 영국군은 프랑스, 호주, 인도, 네덜란드 출신 포로들을 석방하고 재무장시켰으며, 국가의 정상적인 운영에 필수적인 행정 업무를 프랑스 측에 환원했습니다. 영국이 프랑스의 정당한 권리를 의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 보였습니다.
북부의 중국군,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
반면 북위 16도선 이북의 중국군은 전혀 다른 계산 속에 움직였습니다. 통킹, 북부 안남, 북부 라오스는 먼저 규율 없는 병사들의 약탈과 만행에 내맡겨졌고, 고위 지휘부의 일부는 스스로 그 본보기를 보이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중국은 일본 헌병대(켐페이타이) 요원들이 추진하던 작업을 이어받아,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단절을 되돌릴 수 없는 수준까지 심화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아시아는 아시아인의 것"이라는 구호와 목표는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마지막 부대가 철수할 때까지, 즉 항복 절차(1945년 9월 말)를 한참 넘긴 1946년 말까지 북베트남에 잔류한 중국군, 특히 장파쿠이(Tchang Fa Kouei) 원수와 그의 요원들은 자신들에게 충성하는 베트남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 북베트남에 대한 최대한의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베트민마저 경계한 술책
이러한 술책은 너무나 노골적이어서, 정작 베트민 자신도 오래지 않아 위기감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베트민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호치민의 속내, 1946년 1월의 인터뷰
1946년 1월 파리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호치민은 자신의 생각의 핵심을 이렇게 밝혔습니다.
“우리는 프랑스와 프랑스 국민에 대한 증오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깊이 존경하며, 두 민족을 굳게 묶어주는 유대를 끊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프랑스가 최초의 진심 어리고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주기를 요청할 뿐입니다. 우리 문제에 간섭하려는 다른 나라들을 볼 때, 그런 조치는 더욱 절실해집니다. 두 민족 모두 그 나라들에게 훈계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반드시 우리끼리 해결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라면, 싸움이 강요된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결의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