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도착 직후의 굴욕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나와 네 명의 동료들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더욱 분통을 터뜨릴 일은, 이미 한 주 전부터 항복 의사를 밝힌 적국이 몇 달간 함께 싸워온 연합국 장교들을 체포하는 동안, 같은 진영에 있어야 할 미국 측 동료들이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지 때문이었는가, 서투름 때문이었는가, 아니면 단순한 어리석음이었는가? 어느 쪽이든 미국은 훗날 이 판단 착오의 심각성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그 결과물은 지금까지도 미국이 감당하고 있는 광범위하고 무거운 대가로 이어졌다.
'검역'이라는 이름의 억류
일본이 교민들의 안전을 빌미로 협박을 일삼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위 '검역' 조치를 받아들였다. 사실상 이는 억류나 다름없었다. 다만 나는 동료들과 함께 총독부 궁전에 수용되는 조건을 내걸었다.
프랑스 장교들이 여전히 프랑스 주권의 상징으로 남아 있던 그 건물에 머물게 된 것은, 우선 프랑스의 귀환을 알리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덕분에 교민들이 겪고 있던 폭력과 약탈에 잠시나마 숨통이 트이는 효과도 있었다.
무력하게 흘러간 12일
우리는 12일간 일본군과 베트남인 경비병의 감시 아래 궁전에 머물렀다.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할 힘도 없었고, 교민들에게 건넬 수 있는 위로란 본국과 간신히 재연결된 무선 통신이 전부였다. 바로 그 결정적인 시기, 베트남은 거스를 수 없이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그 12일 동안 미국인들은 프랑스 혐오 세력의 불만을 대신 들어주고 호치민의 인맥을 권력에 확고히 자리 잡게 하는 데 바빴다. 우리가 여전히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몇 차례의 짧은 방문으로 확인할 뿐이었다.
보응우옌잡과 비엣민의 붉은기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디엔비엔푸의 승자이자 오랫동안 베트남 민주 공화국 군대의 최고 지도자로 군림해 온 교활한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은, 미국 사절단을 곁에 두고 하노이 성채 위로 비엣민의 붉은기를 게양했던 그날을 가끔 음미하지 않을까.
그 후의 역사,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흐름을 돌이켜보면, 당시 루스벨트 행정부가 제시한 반식민주의 노선에 서 있다고 믿었던 O.S.S.(미국 전략사무국) 요원들은 얼마나 쓰디쓴 후회를 삼켜야 했을까. 그들은 프랑스를 배제함으로써, 오늘날 자신들이 맞서 싸우는 바로 그 공산주의의 길을 열어 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