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리가 눈앞에 보였던 1970년
1970년, 미국은 승리가 곧 눈앞에 다가왔다고 확신했습니다. 전쟁의 목적은 명확하게 규명되었고, 남베트남 국민 역시 이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경제는 부흥기를 맞았고, 군대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었으며, 최신식 공군까지 창설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산 진영의 물자 보급 거점인 라오스와 캄보디아의 '성역(聖域)'들이 연합군에 의해 확인되고 포위된 뒤 파괴되었다는 점입니다.
1972년 대공세와 미국의 강경한 응답
미국의 전쟁 개입은 1972년 3월 31일 북베트남군의 대규모 공세와 함께 마지막 장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공세는 모든 전선에서 저지되었고, 북베트남군은 크게 흔들렸습니다. 당시 평화협상은 이미 수년째 진행 중이었지만, 협상을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은 것은 실패한 공세에 대한 미국의 응답이었습니다. 바로 북베트남 항만에 대한 기뢰 봉쇄와, 1972년 말 하노이 및 하이푸항을 향해 감행된 대규모 전략 폭격이었습니다.
이러한 공습은 초기에 특히 미군 폭격기 부대에게 뼈아픈 대가를 치르게 했습니다. 무려 B-52 17대가 격추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대공미사일(SAM)에 대한 전자전 교란과 미사일 발사진지 파괴 작전이 지속되면서, 북베트남 방공망의 효율은 점차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례없던 방공망 밀도와 B-52의 손실률
B-52의 손실은 12월 19일부터 31일 사이 수행된 총 729회의 출격 횟수에 비례합니다. 하노이 주변에는 역사상 유례없는 밀도의 방공망이 집중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지대공미사일 대대 26개와 고사포 포대 360개가 이곳에 집결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3년 함부르크의 고사포 80개 포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그럼에도 실제 손실률은 2% 미만에 그쳤으며, 이는 같은 전쟁 기간 B-17과 B-24가 입은 손실보다 현저히 낮은 수치였습니다.
'명예로운 평화'라는 환상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 폭격을 비난할 여지는 충분히 있지만, 군사적으로는 놀랍도록 효과적이었고 실제로 북베트남을 평화협정 수락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미국은 이 시점에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믿었고, '명예롭게' 전쟁에서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반전됩니다. 북베트남군은 재건되었고, 소련이 대량 공급한 무기로 엄청난 전력 증강을 이루었습니다. 반면 사이공은 이번에는 미국에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느꼈습니다. 미국 의회는 남베트남이 간절히 요청하던 원조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1975년, 결국 온 붕괴
1975년 봄,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 고원지대를 대대적으로 침공했습니다. 티에우 정권은 순식간에 붕괴했고, 4월 30일 사이공은 함락되었습니다. 미국과 남베트남이 장악했던 제공권은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제공권 자체의 탓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활용되었는가의 문제였다고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