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의심을 불러일으킨 열정: 냉전의 서막이 된 그리스

1946년 9월 27일, 조지 2세 국왕이 망명지에서 그리스로 귀환했다. 그러나 그는 차르다리스 총리에게 자유주의 진영 인사들을 영입해 내각을 확장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정부의 북부 지방 통제력은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고, 산발적인 충돌이 되풀이되면서 나라는 다시 한번 내전의 벼랑 끝에 몰리고 있었다.

공산 게릴라의 재무장

1946년 8월, 그리스 공산당(K.K.E.) 정치국은 전쟁 내내 그리스 북동부에서 E.L.A.S.(그리스 인민해방군) 부대를 지휘해 온 마르코스 바피아디스에게 산악지대로 들어가 다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달, 그리스 정부는 공산 게릴라 소탕 작전에서 헌병대를 대신할 정규군을 투입했다.

이어진 겨울 동안 게릴라들은 오지 마을들을 공격했으며, 특히 북부 지역에서 활발히 움직였다. 알바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등 그리스를 둘러싼 공산권 이웃들은 이들에게 무기와 탄약, 각종 보급품을 넘겨줄 뿐 아니라 국경 인근에 훈련과 휴식을 위한 야영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같은 해 12월, 그리스 정부가 게릴라에 대한 외부 원조를 문제 삼아 항의하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현지 조사위원단 파견을 결정했다. 위원단은 보고서에서 그리스 정부의 항의에 타당성이 있다고 결론지었으나, 소련과 폴란드 대표가 거부권 행사로 이에 맞섰다.

유엔 무대에 오른 그리스 문제

1946년 한 해 동안 그리스 정세는 세 차례나 유엔 회의에서 논쟁거리가 되었고, 이 나라는 막 형성되기 시작한 '냉전'이 펼쳐질 주요 무대 가운데 하나로 빠르게 부상했다. 소련은 직접 개입을 피하면서 발칸 공산국가들로 하여금 대리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그러나 이미 이 단계에서 소련 정부는 티토 대통령의 외교 노선에 불안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스 반군 지원에 드러난 그의 지나친 열정은 오히려 소련 지도부의 의심을 자아내고 있었다.

영국의 철수 선언과 트루먼 독트린

1947년 2월 24일, 종전 후 찾아온 경제 위기에 시달리던 영국 정부는 더 이상 그리스에 막대한 지원을 계속할 수 없음을 자각했다. 그리하여 3월 말까지 그리스에 주둔 중인 4만 명의 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미국 정부에 통보했다. 1944년 당시 영국의 그리스 개입을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보던 미국 국무부의 태도는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미 1947년 1월 트루먼 대통령은 그리스 재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경제 사절단을 파견한 바 있었고, 이제 미국은 공산 세력의 나라 장악을 저지한다는 무거운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마침내 3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의회 연설로 응답했다. 이 연설은 훗날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