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샤를 망생(Charles Mangin): 베르됭 두오몽 요새 탈환의 영웅이자 논란의 식민지 장군

샤를 망생(Charles Mangin, 1866~1925)은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 가장 개성 넘치고도 가장 논란 많은 장군 중 한 사람이다. 두터운 머리칼, 강인한 턱선, 강철 같은 눈빛. 그는 당대 식민지 사업이 허용한 행동 욕구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던 모험가형 군인의 화신이었다. 사르부르(Sarrebourg)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그의 인생은 아프리카 내륙의 원정부터 베르됭 참호의 혈전, 라인란트 점령지의 정치 풍파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극적인 서사였다.

샤를 망생(Charles Mangin): 베르됭 두오몽 요새 탈환의 영웅이자 논란의 식민지 장군
샤를 망생(Charles Mangin) 장군

아프리카를 누비던 젊은 장교

1888년 해군보병대에 입대한 망생은 수단에서 첫 실전 경험을 쌓으며 군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십여 년간 아프리카 대륙 곳곳을 누비며 식민지 장교로서 명성을 쌓았고, 열 해가 지난 1898년에는 마르샹(Marchand) 대위가 이끄는 '콩고–나일 연결 탐사대'의 일원이 되었다. 이 원정은 나일 상류의 파쇼다(Fashoda)에서 영국군과 대치하며 영프 양국 관계를 흔든 유명한 '파쇼다 사건'으로 이어졌다.

모로코 정복과 대전의 시작

1912년 대령으로 승진한 망생은 모로코 정벌 과정에서 자신의 지휘 역량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프랑스 본토에서 시작될 무렵, 그는 이미 보병사단장으로서 전선에 섰다. 그의 부대에는 황금 닻 휘장을 단 식민지 보병들, 즉 동료들이 '바다돼지(marsouins)'라고 부르던 해군보병 병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전선 어디든 투입될 수 있는 정예 돌격 부대였다.

베르됭: 두오몽 요새 탈환

1916년 베르됭 전투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망생의 제5보병사단은 5월 처음으로 두오몽(Douaumont) 지구 전선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24일, 그는 모로코 식민지 보병연대(RICM)와 함께 두오몽 요새를 독일군에게서 되찾아냈다.

이 인상적인 성공에 힘입어 12월 15일에는 포브르 고지(Côte du Poivre), 루베몽(Louvemont), 아르도몽(Hardaumont)을 차례로 수복했고, 그의 병사들은 무려 11,000명의 포로를 생포했다. '베르됭의 영웅'이라는 찬사가 그의 이름 위에 빛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917년의 좌절과 1918년의 반격

그러나 1917년 에느(Aisne) 강에서 벌어진 니벨(Nivelle) 공세에서 제6군을 지휘하던 망생은 크게 실패했고, 그 책임을 물어 잠시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재기는 1918년 제10군 지휘관으로 복귀하면서 찾아왔다. 6월에는 우아즈(Oise) 방면의 독일군 공세를 결연히 막아냈고, 7월 18일 이후에는 샤토티에리(Château-Thierry) 일대에서 반격을 주도해 전세를 뒤집었다.

마른 강변과 에느 강변에서 독일군을 몰아낸 이 연이은 격전 덕분에 망생은 잃었던 명예를 완전히 회복했고, 종전 후에는 라인란트 프랑스 점령지대의 지휘권을 맡았다.

라인란트 논란과 말년

그러나 그가 라인 지방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한 것은 미국과 영국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1920년 현직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대신 그에게는 오랜 무대였던 식민지 군 총감독관 직이 보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그의 군 인생이 시작된 무대였다.

그럼에도 망생에게 붙은 '병사들의 피를 아끼지 않는 지휘관'이라는 굳은 평판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동시대인들은 그를 '도살자(le boucher)'라는 별명으로 불렀고, 이 평가는 그가 1925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이름을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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