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39년 브주라 강 전투: 폴란드의 영웅적인 반격

1939년 브주라 강 전투: 폴란드의 영웅적인 반격

브주라 강 전투(Battle of the Bzura)는 1939년 9월 독일의 침공으로 형성된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 위해 폴란드군이 시도한 가장 중요한 작전이었다.

처음부터 결함이 있었던 방어 계획

폴란드의 방어 계획은 처음부터 결함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가 독일을 공격해 줄 것이라는 기대 아래, 7개 야전군 규모의 부대로 국토 전역을 방어한다는 것이었다. 폴란드군은 북쪽에서부터 브와디스와프 보르트놉스키(Władysław Bortnowski) 장군이 지휘하는 포메라니아 야전군(보병 5개 사단, 기병 1개 여단, 국경여단 2개), 타데우시 쿠체바(Tadeusz Kutrzeba) 장군이 지휘하는 포즈난 야전군(보병 4개 사단, 기병 2개 여단), 그리고 워치 야전군과 크라쿠프 야전군을 배치했다.

독일군은 포메라니아 방면의 제4군과 동프로이센 방면의 제3군으로 폴란드 북부를 공격했다. 양방향에서 타격을 입은 포메라니아 야전군은 남동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독일군은 워치 야전군과 크라쿠프 야전군을 분리시키고, 포즈난 야전군의 배후까지 진출했다.

결국 쿠체바 장군도 포위되지 않기 위해 후퇴해야 했다. 9월 6일, 후퇴 중이던 두 폴란드 야전군은 쿠체바 장군의 지휘 아래 통합되었다. 다음 날, 그들은 독일군의 포위 기동을 감지했다.

그러나 독일군은 포즈난 야전군과의 접촉을 잃은 상태였고, 이 부대가 바르샤바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두 폴란드 야전군이 합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이미 투홀스키 숲 전투에서 격파했던 포메라니아 야전군을 과소평가하여 더 이상 심각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9월 8일이 밝아오자 독일군은 비스와 강 서쪽과 그 지류인 브주라 강 유역의 모든 조직적인 폴란드 저항을 무력화했다고 확신했다. 선봉 부대가 이미 도착한 바르샤바를 향해 비스와 강을 도하하며 진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양측의 전력과 계획

독일 제8군이 자신들의 부대 남쪽에서 브주라 강을 건넜고, 독일 제4군이 북쪽에서 비스와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파악한 쿠체바 장군은,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Rydz-Śmigły) 원수와의 모든 연락이 끊긴 상태에서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쿠체바는 이전에 총사령관에게 자신의 야전군이 남쪽으로 공격해 워치 야전군을 구원하자고 제안했지만,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계획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고, 그는 노출된 독일 제8군의 좌익을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쿠체바가 보유한 병력은 총 9개 보병사단과 3개 기병여단(자료에 따라 수치 차이가 있다), 약 22만 5천 명이었다. 독일군 측에서는 제4군, 제8군, 제10군 소속 17개 사단, 40만 명 이상이 이 전투에 참여했다.

반격의 개시

9월 9일 저녁, 폴란드군은 브주라에서 독일 제8군에 대한 첫 공격을 개시했다. 최초의 타격은 독일 제24보병사단과 제30보병사단이 받았다. 이들은 놀코바츠키(Knoll-Kownacki) 군단 소속 폴란드 제14, 17, 25, 26보병사단과 맞섰고, TKS·TK-3 경전차로 증강된 포돌스카 기병여단과 빌코폴스카 기병여단이 측면을 엄호했다.

기습을 당한 독일 사단들은 4,500명의 사상자를 내고 20km에 걸쳐 후퇴했다. 다음 날 공격이 계속되었고, 이를 저지하려던 독일 제17보병사단마저 물러났다.

독일 지도부는 폴란드군을 극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의 우위를 갖지 않았거나, 폴란드군이 강력한 기동 부대를 보유했더라면 어쩌면 전쟁의 흐름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9월 11일에야 독일군은 위협의 실체를 깨닫고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제10군을 전투에 투입했다. 이 군에는 강력한 제1기갑사단과 제4기갑사단, 그리고 당시 연대급 편제였던 '라이프슈탄다르테 아돌프 히틀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독일군은 절대적인 제공권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폴란드군은 영웅적으로 진격을 계속하며 워치 야전군의 잔존 병력과의 합류를 희망했다. 그러나 해당 야전군이 큰 타격을 입은 채 동쪽으로 후퇴했다는 통보를 받은 쿠체바는 더 이상 전략적 의미가 없어진 공격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운명적인 결말

이후 폴란드군은 동쪽으로 후퇴하기로 했다. 포메라니아 야전군은 바르샤바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동진했다. 독일군은 이제 기갑사단 2개, 자동차화사단 1개, 경사단 3개, 총 800대의 장갑 차량을 이 방면에 투입했다(경사단은 장갑 및 자동차화 요소를 보유한 부대로, 폴란드 침공 이후 기갑사단으로 개편되었다).

9월 16일부터 독일군은 항공 지원을 앞세워 용감한 폴란드군을 모든 방향에서 공격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폴란드군은 비스와 강, 브주라 강, 독일군 사이의 좁은 삼각형 지역으로 몰렸다. 독일 제1보병사단은 소하체프(Sochaczew)에서 브주라 강 도하에 성공했지만, 결국 폴란드 제25보병사단에 의해 저지당했다.

폴란드군은 브주라 강 합류점 북쪽에서 비스와 강을 도하해 바르샤바로 빠져나감으로써 포위망을 탈출하려 했다. 9월 17일 저녁, 포즈난 야전군의 병력들은 포위망 돌파를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폴란드군은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새벽이 밝아오자 독일 항공기들이 그들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렸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틀을 더 싸웠다. 두 야전군의 일부 부대는 탈출에 성공해 바르샤바와 모들린(Modlin)으로 피신했다. 제15, 25보병사단과 포돌스카·빌코폴스카 기병여단의 잔존 병력들이었으며, 쿠체바 장군과 놀코바츠키, 토카르젭스키 장군도 그들과 함께했다.

제4, 14, 17, 26, 27보병사단은 보르트놉스키 장군과 함께 절망적인 싸움을 9월 22일까지 이어갔고,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았다. 폴란드군은 장군 3명을 포함해 2만 명이 전사했고, 3만 2천 명이 부상당했다. 총 17만 명의 폴란드군이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은 8,000명이 전사했고, 폴란드 항복 후 석방될 4,000명의 포로를 잡았다. 또한 약 150대의 전차와 장갑 차량, 20문의 야포를 잃었다.

희생이 남긴 의미

영광스러운 브주라 전투는 전세를 바꾸지 못했다. 용감한 폴란드군이 그들의 희생으로 얻은 것은 바르샤바를 향한 독일군의 진격을 며칠 늦추어 수비군에게 시간을 벌어준 것뿐이었다.

그러나 전력의 균형이 너무나 독일군 쪽으로 기울어 있어 승리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게다가 소련은 이미 9월 17일부터 동쪽에서 침공을 개시하며 폴란드의 등을 찌르고 있었다.

1939년 브주라 강 전투: 폴란드의 영웅적인 반격

1939년 폴란드. 양측 병력의 초기 집결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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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폴란드. 작전의 제2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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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의 타데우시 쿠체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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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격하는 폴란드 보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