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보리스 비안: 재즈와 문학에 평생을 바친 프랑스의 천재 예술가

보리스 비안: 재즈와 문학에 평생을 바친 프랑스의 천재 예술가

보리스 비안(Boris Vian, 본명: Boris Paul Vian)은 1920년 3월 10일 프랑스 빌다브레(Ville-d'Avray)에서 네 자녀 중 한 명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 작사가, 가수, 비평가였으며,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한 재즈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에콜 상트랄(Ecole Centrale) 출신의 엔지니어, 번역가, 각본가, 강연자, 배우, 화가로서 다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 예술가였습니다.

풍요롭지만 병든 유년기

보리스 비안은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했습니다. 아버지 폴 비안(Paul Vian)과 어머니 이본 볼데마르라브네스(Yvonne Woldemar-Ravenez)는 모두 잘사린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조부로부터 상당한 재산을 물려받은 연금 생활자였는데, 그 재산의 기반은 증조부가 일궈 놓은 예술적 철공 사업이었습니다. 가족은 뤼프라디에(rue Pradier)에 위치한 '레포베트(Les Fauvette)'라는 저택에서 운전기사, 정원사, 미용사, 가정교사까지 고용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렐리오, 보리스, 알랭, 니논 등 모든 자녀들은 네 살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1929년 주식 시장 대폭락 이후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비안 가족은 자녀들과 함께 저택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열두 살 무렵, 보리스는 감염성 편도선염(인후염)을 앓은 뒤 심장 리우마티즘에 시달렸고, 제대로 치료되지 않은 다른 질병들이 겹치면서 치명적인 심장 질환으로 발전했습니다. 이 질환은 결국 1959년 그의 죽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의 병마는 『붉은 풀(L'Herbe rouge)』, 『심장을 노리는 자(The Heartsnatcher)』, 『흙거품의 나날들(L'Écume des jours)』 등 여러 작품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학업과 재즈의 만남

보리스 비안은 세브르 콜레주(Collège de Sèvres)에서 학업을 시작해 베르사유의 오슈 고등학교(Lycée de Hoche)로 진학했습니다. 열다섯 살 때 장티푸스를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라틴어-그리스어 바칼로레아에 면제 혜택을 받아 합격했으며, 열일곱 살에는 콩도르세 고등학교(Lycée Condorcet)에서 철학-수학-독일어 과목의 두 번째 바칼로레아를 취득했습니다. 1939년에는 에콜 상트랄 데 자르 에 마뉘팍튀르(Ecole Centrale des arts et manufactures)에 입학해 3년 후 엔지니어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그 곁에는 언제나 재즈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프라이즈 파티'를 직접 기획하며 젊은 날의 열정을 재즈에 쏟아부었습니다. 1940년에는 독일 점령 지역을 피해 피난했고, 1941년 미셸 레글리스(Michelle Léglise)와 결혼했습니다. 미셸은 그에게 영미 문학 번역 기술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 결혼 생활에서 1942년 첫째 아들 패트릭(Patrick), 1948년 딸 카롤(Carole)이 태어났습니다.

아들이 태어난 같은 해, 비안은 프랑스 표준화 협회(AFNOR)의 엔지니어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에는 클로드 아바디(Claude Abadie)의 아마추어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합류했는데, 이 오케스트라는 전후 당대 최고의 아마추어 재즈 단체 중 하나로 손꼽혔습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트럼펫 연주자는 빅스 바이더벡(Bix Beiderbecke)이었습니다. 앙리 살바도르(Henri Salvador)는 그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는 재즈를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재즈만을 위해 살았으며, 재즈로만 듣고 재즈로만 말했습니다."

작가로서의 궤적과 말년

비안은 1944년부터 1945년까지 필명으로 첫 글들을 발표했고,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근무하던 레몽 크노(Raymond Queneau)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베르코캥과 플랑크톤(Vercoquin et le Plancton)』을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1946년에는 AFNOR를 떠나 종이 관리국(Office du Papier)의 엔지니어로 자리를 옮겼고,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를 만나 『현대(Les Temps modernes)』지에 협력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그는 버넌 설리번(Vernon Sullivan)이라는 필명으로 『네 무덤 위에 침을 뱉으러 간다(J'irai cracher sur vos tombes)』를 발표했고, 이 소설은 1947년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대표작 『흙거품의 나날들』도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후 그는 엔지니어 일을 접고 '타부(Tabou)' 오케스트라의 트럼펫 연주자 겸 진행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네 무덤 위에 침을 뱉으러 간다』의 재판 결과로 인해 이 책은 1949년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설리번 명의로 낸 처음 두 소설 역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1951년에는 『장군들의 스낵(The Generals' Snack)』을 작곡했으며, 1952년 파타피직스 대학(College of Pataphysics)으로부터 1급 고기잡이(knacker)로 임명되었고, 후에는 사트라프(Satrap) 칭호까지 받았습니다. 같은 해 미셸과 이혼한 그는 하숙방에서 번역 일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1954년 우르술라 쿠클러(Ursula Kubler)와 재혼하면서 본격적인 가수 활동과 순회 공연을 시작했고, 필립스(Philips)에서 예술 감독으로 일하며 수많은 노래와 시나리오를 창작했습니다.

1959년에는 장 들라누아(Jean Delannoy) 감독의 영화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파리의 추기경 역, 로제 바딤(Roger Vadim) 감독의 『위험한 관계』에서 프레방 역으로 카메오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네 무덤 위에 침을 뱉으러 간다』의 제작에는 끝내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1959년 6월 23일 파리에서 열린 이 영화의 시사회 상영 중, 보리스 비안은 심장 발작을 일으켜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급성 관절 리우마티즘이 대동맥판 폐쇄 부전증을 일으킨 것이 사인이었습니다. 향년 39세였습니다.

영원한 청소년으로 남은 유산

보리스 비안은 평생을 음악, 특히 순수한 사랑을 담았던 재즈와 문학에 헌신했습니다. 생전에 그는 열한 편의 소설, 네 권의 시집, 여러 편의 희곡, 단편 소설, 영화 대본, 그리고 수백 곡의 노래를 남겼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알제리 전쟁 직전에 쓴 『탈영병(Le Déserteur)』으로, 이 노래는 그에게 무정부주의자라는 낙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사이에 큰 호응을 얻었으며, 오늘날에도 젊은 독자층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습니다. 기성 세계의 관습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과 예술을 관통했던 그는 '영원한 청소년(eternal teenager)'이라는 별명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