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필리프 페탱(Henri Philippe Pétain, 1856~1951)은 제1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베르뒹의 구원자'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에 협력한 비시 정권의 수반이 되면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로 남았다.
제1차 세계대전, '베르뒹의 구원자'로 등극하다
1916년 초, 60세를 맞은 페탱은 베르뒹 방어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파리에서 오랜 동거인이었던 외제니 아르동(Eugénie Hardon) 곁에서 발견된 그는 참모부와 함께 소이(Souilly) 마을의 시청으로 사령부를 옮겼다.
병사들은 페탱을 깊이 신뢰했다. 그는 영웅적 희생보다 병사들의 생명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프르(Joffre)가 몇 미터의 참호를 되찾기 위해 수천 명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시키려 했다는 사실과 비교하면 뚜렷한 대조였다. 페탱은 다른 장교들과 달리 병사들의 생활 환경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고, 동시에 탁월한 지휘 감각도 널리 인정받았다.
1916년 3월 4일, 전선은 증원이 절실했다. 폭격으로 파헤쳐진 땅에서는 자동차 운행이 어려워 말과 역마차가 동원되어 증원 부대와 물자를 실어 날랐다. 덕분에 보급선은 끊기지 않고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다. 훗날 페탱은 '베르뒹의 구원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다.
같은 해 4월 10일, 그 유명한 한마디가 탄생했다. "용기를 내라…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 영·프 연합군이 독일 황태자(크론프린츠)의 모든 공세를 격퇴한 뒤, 이 말은 프랑스 전역의 신문에 실렸다. 선전 기관은 이 격려의 메시지를 전 국민을 향한 구호로 확산시켰고, 1917년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은 이 문구를 뒤틀어 "우리 지휘관들을, 우리가 응징하리라!"라고 외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비시(Vichy) 정권의 수반이 되다
1939년 9월 3일 시작된 '가짜 전쟁(phoney war)'은 1940년 6월 22일 체결된 정전 협정으로 막을 내렸다. 페탱은 대국민 담화에서 단순히 적대 행위를 종식하는 것을 넘어, 제3제국으로부터 일정한 양보를 받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늘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이제 싸움을 멈추어야 합니다." (1940년 6월 17일)
바로 다음 날인 6월 18일, 드골 장군은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며 저항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쌓아온 원수의 명성과 조국에 대한 헌신은 여전히 많은 프랑스 국민의 신뢰를 얻기에 충분했다.
"영광의 시절,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정부 수반으로서 어두운 시절에도 나는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앞으로도 함께할 것입니다. 내 곁에 있어 주십시오. 싸움은 계속됩니다. 그것은 프랑스를 위한 싸움이며, 프랑스의 땅과 프랑스의 아들들을 위한 싸움입니다." (1940년 6월 20일)
정전 협정은 서명 3일 뒤 시행되었고, 같은 해 10월 30일 프랑스는 공식적으로 독일과의 협력 노선에 들어섰다. 비시 정권이 국정을 장악한 가운데 프랑스는 북부의 독일 국방군 점령 지역과 남부의 자유 지역으로 갈라졌다. 또 하나의 분열도 깊어졌다. 페탱파와 드골파 사이의 갈등, 그리고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균열이 그것이었다.
특히 1942년의 벨 도리브(Vél d'Hiv) 검거 사건은 프랑스 경찰이 직접 집행한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는 비시 정권이 승인한 최초의 여성·아동 대규모 추방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