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명에 맞선 청년, 문학과 혁명의 길로
파리에서 태어나 크레테유에서 생을 마감한 앙드레 말로(1901~1976)는 작가이자 정치가, 행동하는 지성의 표상이었다. 전갈자리 아래 태어난 그는 "죽음의 징표"라 불리던 별자리처럼, 평생 죽음과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싸웠다. 어린 시절은 베일에 싸여 있다. 여성들의 손에서 자라나 종교 교육을 받았으나, 니체의 영향으로 반항심 속에서 이를 거부했다. 평생 그를 괴롭힌 것은 덩케르크에서 일어난 할아버지의 불가해한 자살이었다.
18세가 되자 그는 댄디가 되었다. 습작들을 발표하며 문학에 발을 들였고, 입체파 화가들과 교류했으며, 클라라 골트슈미트와 결혼해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를 휩쓴 생명에 대한 갈망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는 성공을 갈망했다.
인도차이나: 모험과 각성
1923년, 말로는 인도차이나로 떠났다. 목표는 캄보디아의 반테아이 스레이 사원. 그는 조각상과 부조들을 떼어내 유럽에서 팔려 했으나, 식민 당국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프놈펜에서 체포되어 재판받고 유죄 판결을 받은 그였다. 아내의 연락을 받은 파리 문단—모리아크, 지드, 브르통 등이 구명 운동에 나섰고, 이듬해 그는 사면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미 그는 1920년대 시대의 정신과 플랑드르적 환상이 깃든 작품들—《종이 달》(1921), 《프랑스 정원의 공기 토끼》(1922), 《코 달린 우상을 위한 글》(1924) 등을 발표한 상태였다. 캄보디아 체험은 그에게 인도차이나의 실상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거듭 그곳으로 돌아가 사이공에서 응우옌 포와 함께 '청년 안남 운동'을 조직하고, 기관지 《앵도신》, 《사슬에 묶인 앵도신》을 창간해 식민지 수탈을 고발하고 토착민의 자유 열망을 대변했다.
문학적 성숙과 정치적 전위
병약한 몸으로 사이공을 떠나야 했던 말로는 1926년 파리에서 《서방의 유혹》을 출간하며 첫 대작을 선보였다. 초기작 계열의 습작들을 몇 편 더 냈으나, 1928년 《기묘한 왕국》으로 그 주기를 마감했다.
같은 해 《정복자들》이 출간되었다. 광둥의 쿨리 파업을 다룬 이 서사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순식간에 말로 혁명적 극좌파의 대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의 실험과 코민테른 노선을 가장 열렬히 옹호하는 논객이 되었다. 캄보디아 체험에서 영감을 얻은 《왕도》(1930)를 발표하고, 인도에서 미국까지 세계를 누볐으며, 트로츠키와 《정복자들》과 모스크바의 혁명 전략을 놓고 공개 토론을 벌였다. 1933년 《인간의 조건》으로 공쿠르상을 수상하며 국제적 명성을 확고히 했다.
집단적 모험, 파시즘과의 대결
집단적 투쟁 속에서, 인간의 의지와 생에 대한 갈망을 강조하며 말로는 운명이 던진 도전과 신을 버린 세계의 부조리에 대한 첫 번째 답을 찾았다.
그러나 파시즘이 유럽을 삼키려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권력을 잡은 파시즘 앞에서, 말로는 예멘 상공의 비행 중 시바 여왕의 수도 유적을 찾던 허망한 환상에서 깨어나, 글쓰기가 아닌 정치적 행동에 몸을 던졌다. 트로츠키를 만나고, 디미트로프 석방 투쟁을 이끌었으며, 텔만 위원회 의장이 되고, 반전반파시즘 국제연맹 상임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멸시의 시절》(1935)을 썼고, 소련 작가 대회에 참석해 곳곳에서 인간의 존엄과 고귀함을 옹호하는 연설을 했다.
스페인 내전: 희망과 결별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말로는 마드리드로 달려가 위기에 처한 공화국 편에 섰다. 국제여단이 만들어지기 전, 그는 '에스파냐 비행대'를 조직해 지휘하며 메데인, 마드리드, 톨레도, 테루엘의 초전(初戰)에 참여했다. 전쟁과 용기에 대한 성찰에서 1937년 《희망》이 태어났고, 훗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스페인에서 말로 공산주의 운동과의 내밀한 결별이 시작되었다. 스탈린주의적 방식도, 바르셀로나에서 아나키스트 지도자 안드레 닌이 암살된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의 이탈을 확정적 적대로 굳혔다.
레지스탕스와 드골과의 만남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그는 기갑부대에 자원입대했다. 1940년 6월 상스에서 포로가 되었으나 5개월 만에 탈출해 자유 지구로 향했다. 런던의 드골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 협력을 요청했으나, 편지는 끝내 닿지 않았다.
2년 넘게 그는 문학에 몰두했다. 《천사와의 투쟁》을 구상했으나 서두만 남아 1943년 스위스에서 《알텐부르크의 너도밤나무들》로 출간되었고, T. E. 로렌스에 대한 저작도 1장만 1946년 《그것뿐이었나》로 나왔다. 하지만 스페인 공화국의 전 대령에게 무활동은 고통이었다. 레지스탕스가 본격화되자 코레즈와 도르도뉴의 국내 조직과 접선해 '베르제 대령'이란 가명으로 나섰다. 1944년 '다스 라이히' 사단과 맞서 싸웠고,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툴루즈 해방으로 풀려났다. 알자스로렌 여단을 창설해 보주 산맥, 다네마리, 스트라스부르 전투를 치르고, 1945년 나치즘의 성지 뉘른베르크에 입성했다.
드골의 동지, 문화장관으로서
1945년, 말로와 드골 장군은 처음 만났다. 서로에게 첫눈에 반한 운명적 만남이었다. 말로는 6월 18일의 사내 편에 섰고,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았다. 혁명의 시대는 가고 조국의 시대가 왔다. 소설의 시기는 끝났으나, 예술과 문화의 대화, 정신의 변신에 대한 성찰이 운명의 도전과 삶의 부조리에 대한 가장 높은 응답이 되었다.
몇 년 사이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장관, RPF(프랑스 인민 연합) 국가 선전 대표를 지내며 《예술 심리학》(1947~1949), 《토성》(1950), 《침묵의 목소리들》(1951), 《세계 조각 상상 박물관》(1952~1954)을 연이어 출간했다.
1958년 알제리 문제로 제4공화국이 붕괴하자 드골이 복귀했고, 말로도 그를 따랐다. 먼저 공보장관을 지낸 뒤 10년 넘게 문화장관(국무장관)으로 재임했다.
문화정책과 외교 무대에서
장관으로서 그는 문화의 집 정책을 펼치고, 권위 있는 전시회들을 잇달아 열었으며, 그리스와 이집트를 방문했고, 파리의 기념물들을 세척(화이트워싱)했으며, 프랑스 문화유산 목록을 작성하고 연극을 장려했다. 드골의 동반자로서 차드, 가봉의 독립 기념식과 멕시코, 일본 공식 방문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오를레앙의 잔 다르크 축제, 루브르의 브라크와 르 코르뷔지에 장례식, 팡테옹의 장 물랭 안장식에서 행한 연설들은 공화국의 이름으로 행해진 그의 가장 중요한 발언들이었다. 그의 행보의 의미는 언제나 같았다. 모든 억압과 소외 앞에서 인류를 해방시키는 프랑스의 사명을 증언하는 것.
그러나 작가임을 잊지 않았다. 1967년 《반회고록》을 출간했다. 사적 연대기가 아닌 웅장한 역사적 프레스코화였다.
은퇴와 최후의 문학적 열정
1969년 4월 27일 국민투표 패배로 드골이 이튿날 권좌를 떠나자, 말로의 충성은 개인적 충성의 차원이었기에 즉각 퐁피두 당선 후 베리에르 르 뷔송으로 은퇴했다. 생의 마지막 해들을 놀라운 문학적 활동에 바쳤고, 벵골 사태에 개입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1971년 《벌목되는 참나무들》(콜롱베에서의 드골과의 마지막 대화), 1974년 《흑요석 머리》(피카소에 대하여), 같은 해 말 《나사로 혹은 무덤으로의 강림》, 《신들의 변신》 마지막 두 권 《비실재》와 《초시간》(1974, 1976), 1975년 《나그네들》을 연이어 펴냈다.
질병과 세계를 누빈 삶의 소진, 평생 그를 맴돈 죽음의 그림자(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자살, 연인 조제트 클로티스의 비극적 죽음, 두 이복동생의 전사, 1961년 두 아들의 교통사고)로 무너진 그는 1976년 11월 23일 숨을 거두고 베리에르 르 뷔송에 안장되었다.
유작 《불안한 인간과 문학》은 그의 예술에 대한 성찰이자 문화의 죽음과 우연의 도래에 대한 절망적 명상으로, 죽음이 남긴 미완성 상태로 몇 달 뒤 출간되었다.